두예(杜預)는 비석 두 개에 자신의 공훈을 적어 새겼다. 하나는 한수(漢水) 속에 가라앉히고 다른 하나는 만산(萬山)의 위에 세웠다. 그러고는 말했다. "후세에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짝이 언덕이 될 수도 있다."
백거이(白居易)가 자신의 시고(詩稿)를 모아 정리한 후 불상에 복장(腹藏)으로 넣게 했다. 여산의 동림사(東林寺)와 동도(東都)의 성선사(聖善寺), 그리고 소주의 남선원(南禪院)에 각각 보냈다. 책마다 기문을 따로 적었다. 어느 하나가 망실돼도 다른 것은 남을 테니 일종의 보험을 들어둔 셈이었다.
사조제(謝肇淛)가 덧붙였다. "사람이 이름을 좋아함이 참 심하다. 두 사람의 공적과 문장이라면 어찌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하겠는가?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를 내세우기를 이처럼 한단 말인가?" 호명자표(好名自標)는 그러니까 명예를 좋아해 남이 알아주지 않을까 봐 제 이름을 직접 드러내려 애쓴다는 말이다. '문해피사(文海披沙)'에 나온다.
청나라 옹방강(翁方綱)도 백거이의 일을 본떠 자신의 '복초재집(復初齋集)'을 항주 영은사(靈隱寺)에 보관케 하고, 다시 한 부를 추사 김정희 편에 초상화와 함께 해남 대둔사(大芚寺·지금의 대흥사)로 보내 보관케 했다. 설령 중국에서 천재지변을 만나 책이 다 사라져도 조선의 남쪽 끝에는 남아 있을 것이란 희망을 담았다.
추사는 그 책을 대둔사로 보내면서 해동의 영은사란 뜻으로 '소영은(小靈隱)'이란 세 글자를 편액으로 써서 함께 선물했다. 다산이 그 소식을 듣고 아름답게 여겨 양근(楊根) 소설산(小雪山)에 남은 태고(太古) 보우(普愚 )가 머물던 절터에 암자를 세워 그 책을 옮겨 와 중노릇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자 초의(艸衣)를 꼬드겼을 정도다.
위 세 사람은 세상이 기릴만한 큰 자취를 남겼으니 없는 것을 만들어 표방한 것은 아니다. 도처에 나붙기 시작한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현수막을 보니 저마다 제 이름을 걸고 나밖에 없다고 자랑이 한창이다.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가려낼까? 그게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