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사 승려 호의(縞衣·1778~1868)는 다산이 초의(草衣) 이상으로 아꼈던 제자였다. 다산이 세상을 뜬 뒤로도 그는 해마다 두릉(斗陵)으로 햇차를 만들어 보냈다.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던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丁學游·1786~1855)가 해남서 온 물건을 받아들자 벌써 종이를 뚫고 차 향기가 진동한다. 그는 급히 봉함을 끌렀다. 차와 함께 편지 한 통이 얌전하게 들어 있다.
편지는 서두가 이렇다. "서편 봉우리에 남은 해여서, 살아생전 서로 만나볼 인연이 없군요. 달빛이 선창(禪窓)에 비쳐들면 문득 두릉을 생각하곤 했습니다(西峰殘日, 生前無緣相面. 月入禪窓, 忽憶斗陵)." 읽다 말고 맑은 눈물이 뚝 떨어진다. 정학유의 '운포시집(耘逋詩集)' 중 '호의노사가 두륜산에서 직접 딴 새 차를 보내왔으므로 시로 답례한다(縞衣老師以頭輪山自採新茶見贈, 酬之以詩)'는 긴 제목의 시에 보이는 사연이다.
건너뛰며 읽는 시는 이렇다. "대숲 아래 이끼가 좋은 차를 길러내어, 대광주리 깨끗이 딴 매발톱이 가득하다. 자기 그릇 바람 에워 연기를 흩더니만, 돌솥의 눈가루에 구슬 떨기 떠오른다. 신령한 액 혀와 목을 다 적시기도 전에, 묘한 향기 먼저 풍겨 살과 뼈에 스미누나. 털구멍 송송송송 땀이 살풋 젖더니만, 환원(還源)하여 삿됨 씻음 잠깐의 사이일세(竹下莓苔毓精英, 鮮摘筠籃盈鷹觜. 瓷盌回風散輕霞, 石銚滾雪浮珠蕊. 靈液未遍沾舌喉, 妙香先通淪肌髓. 毛竅淅淅微汗滋, 還源蕩邪斯須耳)."
돌솥의 곤설(滾雪)은 눈가루처럼 날리는 차맷돌에 간 떡차 가루를 말한다. 이것을 물에 넣고 함께 끓이자 구슬인 양 물 위로 거품이 떠올랐다. 털구멍마다 촉촉이 땀이 솟아 잠깐만에 '환원탕사(還源蕩邪)', 즉 원래 상태로 돌아가 몸 속의 삿된 기운이 말끔하게 씻겨지더라고 했다. 차의 효용을 설명한 가장 멋진 표현이다.
조금 건너뛰어 "오호라 이 같은 일 서른 해나 되었지만, 편지 담긴 두터운 정 처음과 끝 다름없네(嗚呼此事三十年, 緘情滾滾終如始)."라 한 것을 보면 호의의 햇차 선물은 30년째 이어온 일이었다. 경박해져만 가는 세상이라지만 신의와 오가는 정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