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443] 국곡투식 (國穀偸食)

bindol 2020. 8. 4. 06:01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사철가'는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로 시작한다. 가락이 차지다. 가는 세월을 늘어진 계수나무 끝 끄터리에다 대랑 매달아 놓고 "국곡투식(國穀偸食) 하는 놈과 부모 불효 하는 놈과 형제 화목 못 하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 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 앉아서 한잔 더 먹소 덜 먹게 하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 하는 끝 대목에 이르면 공연히 뜨끔해져서 마음자리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든다. 신관 사또에게 모진 매를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의 심정을 노래한 12잡가 중 '형장가(刑杖歌)'에도 "국곡투식 하였느냐 엄형중치(嚴刑重治)는 무삼 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국곡투식은 나라 곡식을 훔쳐 먹는다는 말이다. 서리(胥吏)들이 장부를 조작하는 등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백성의 고혈을 빨고 국고(國庫)를 축내는 간악한 짓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목민심서' '곡부(穀簿)' 조에는 "윗물이 흐린지라 아랫물 맑기가 어렵다. 서리들이 간특한 짓을 함에 온갖 방법을 갖추지 않음이 없다. 귀신같이 간악하고 교활하니 밝게 살필 도리가 없다(上流旣濁, 下流難淸. 胥吏作奸, 無法不具. 神姦鬼猾, 無以昭察)"고 한 뒤 이들의 12가지 교활한 수단을 소개했다. 그 설명이 이해하기 어렵게 복잡할 뿐 아니라 수단이 교활하고 독랄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 토호(土豪)들의 농간까지 끼어들면 백성이 유리걸식 신세가 되는 것은 실로 잠깐이었다. '목민심서' '형전(刑典)' 조에는 청주 목사(淸州 牧使) 정경순(鄭景淳)이 국곡(國穀)을 축내고 갚지 않는 토호에게 주패(朱牌)를 내어 독촉하니, 호족이 그 뒷면에 '정모역적(鄭某逆賊)'이라고 써서 돌려보내는 패악을 부렸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건드리느냐는 뜻이다. 당장 붙잡아 오게 해서 다짐장에다 썼다. "관의 명령을 거역함을 역(逆)이라 하고, 국곡을 투식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네놈이야말로 역적이다." 그러고는 30대의 호된 매질을 가했다. 그제야 영이 섰다. 나랏돈을 제 호주머니 돈 쓰듯 해 국고를 축내니, 그게 다 백성의 세금에서 나온 돈이다. 하기야 윗물이 흐린데 아랫물 맑기를 바라겠는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22/20171122033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