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초립(草笠)은 연실(蓮實)로 갓끈의 영자(纓子)를 달았다. 조용한 방에 들어앉아 깊은 밤에도 책을 읽었다. 사방은 적막한데 이따금 연실이 서안(書案)에 닿으면서 가볍게 울리는 소리가 밤새 들렸다(輕輕有聲).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산림의 중망(重望)을 안고 이조참판에 올랐지만, 막상 아무 하는 일이 없었다. 김굉필이 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도란 겨울에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 마심이니, 개면 가고 비 오면 멈춤을 어이 능력 있다 하리. 난초 만약 세속을 따르면 종당엔 변하리니, 소는 밭 갈고 말은 탄단 말 그 누가 믿으리오道在冬裘夏飮氷, 霽行潦止豈全能. 蘭如從俗終當變, 誰信牛耕馬可乘)." 시의 뜻은 이렇다. "선생님! 대체 이게 뭡니까? 아무리 추이를 따르더라도 하실 일은 하셔야지요. 날이 개면 길 나서고, 비 내리면 들어앉는 것이야 누가 못합니까? 난초가 세속에 뒹굴면 잡초가 됩니다.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법이지요. 저는 선생님께서 소 등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 눈치 저 눈치 보시며 아무 일도 않으시니 왜 거기 계십니까?" 신랄하고 독한 말이었다.
김종직의 답시는 이렇다. "분에 넘는 벼슬자리 벌빙(伐氷)까지 올랐지만, 임금 바로잡고 세속 구제함 내 어이 능히 하리. 후배에게 못났다는 조롱까지 받게 되니, 구구한 세리(勢利)일랑 오를 것이 못 되누나(分外官聯到伐氷, 匡君救俗我何能. 從敎後輩嘲迂拙, 勢利區區不足乘)." 벌빙은 경대부(卿大夫)의 지위를 뜻한다. 고대에 경대부라야 얼음을 보관해 두었다가 제사 때 쓸 수 있대서 나온 말이다. "내가 분에 넘치게 높은 지위에 오르긴 했네만, 대체 일을 맡을 만한 역량이 있어야 말이지. 자네 같은 후배까지 나를 못났 다고 이렇게 조롱하니, 구구한 이 벼슬길에 내가 왜 올랐는지 모르겠구먼." 말은 점잖게 했지만 깊은 유감이 깔려 있다. 이 일로 사제는 다시 얼굴을 보지 않았다.
세밑이다. 광군구속(匡君救俗)의 포부가 제행료지(霽行潦止), 즉 개이면 길 나서고 비 오면 멈추는 눈치 보기로 바뀌는 것은 잠깐만이다. 연실 갓끈 영자가 서안에 부딪히며 내는 잔잔한 소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