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463] 취우표풍 (驟雨飄風)

bindol 2020. 8. 5. 04:51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1776년 정조가 보위에 오르자 권력이 모두 홍국영(洪國榮·1748~1781)에게서 나왔다. 29세의 그는 도승지와 훈련대장에 금위대장까지 겸직했다. 집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고 대궐에서 생활했다. 어쩌다 집에 가는 날에는 만나려는 사람들이 거리에 늘어서고 집안을 가득 메웠다.

홍국영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째서 소낙비[驟雨]처럼 몰려오는 겐가?" 한 무변(武弁)이 대답했다. "나리께서 회오리바람[飄風]처럼 가시기 때문입지요."

홍국영이 껄껄 웃으며 대구를 잘 맞췄다고 칭찬했다. 취우표풍(驟雨飄風)은 소나기처럼 권력을 휘몰아치다가 회오리바람처럼 사라진 홍국영의 한 시절을 상징하는 말로 회자되었다. 심노숭(沈魯崇·1762~1837)의 '자저실기(自著實紀)'에 나온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3년 뒤에 실각했다. 정조는 그에게 지금의 연세대학교 뒤편 홍보동(紅寶洞)에 집을 하사했다. 그는 한겨울에 숯불을 피워가며 으리으리한 집을 지었다. 낙성식에는 조정 대신이 다 달려가서 축하했다. 집 이름을 취은루(醉恩樓)라 지었다. 임금의 은혜에 취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숙위소에 보관했던 물건을 새집으로 옮겨올 때 장정 30~40명이 동원되어 10여일을 날라야만 했다. 돈이 5만냥에 패도(佩刀)가 3000자루, 쥘부채만 1만자루가 넘었다.

임금에게 내쳐진 뒤 그는 미친 사람처럼 허둥대며 안절부절못했다. 혼잣말로 "아무개는 죽여야 하고, 아무개는 주리를 틀어야 한다"고 중얼댔다. 그 좋은 집에서는 살아보지도 못하고 강릉으로 쫓겨갔다.

서울서 편지가 오면 반가워 뜯었다가 이내 찢고 돌아누워 엉엉 울었다. 길 가던 무지렁이 백성을 붙들고 잘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듣던 이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면 손으 로 땅을 치면서 통곡을 했다.

1년 만에 죽어 달구지에 실려 와 경기도 고양 땅에 묻혔다. 영정에 은마도사(恩麻道士)라고 쓰여 있었다. 은마는 임금이 벼슬을 임명할 때 내리는 조서를 말한다. 그는 권력에 도취하고 은혜에 취해 취은루를 짓고, 은마의 추억을 곱씹다 죽었다. 심노숭은 이 일을 적고 나서 그의 무덤은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는 한마디를 보탰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8/20180418033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