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林(유림)속 한자이야기
작가 최인호씨의 연재소설의 제목 의 儒(선비 유)자는 사람 인(人)과 모름지기 수(需=須)의 결합이다. 사람들에게 모름지기 있어야 할 道(도리 도)를 닦는 선비를 뜻한다.
儒라는 한자는 집단을 뜻하는 林(수풀 림)자와 결합되어 공자 등 聖賢(성현:성인과 현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經典(경전:성인의 글이나 언행을 기록한 책)과 그에 관련된 학문을 연구·실천하고 국가사회에 구현하고자 했던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의 어휘로는 선비의 무리를 뜻하는 士林(사림)과 道敎(도교)가 유행이었던 고려시대에 盲人(맹인)들이 杖(지팡이 장)을 짚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운수를 보아 주고 숙식을 해결했다고 해서 생긴 杖林(장림),그리고 학자 또는 文人(문인)의 모임이라는 뜻의 翰林(한림) 등이 있다.
유림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본다면 유학이 삼국시대에 정착된 후 조선왕조 건국이념의 기반이자 주 학문 및 이념으로 정립되면서 특정 學者(학자) 또는 서원 및 향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서원은 주세붕이 설립한 경북 영주에 있는 백운동서원(지금의 소수서원)을 시초로 각 지방마다 세워져 사립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향교는 국가가 관장하는 일종의 국립교육기관이었다.
서원과 향교에서는 유학 경전과 유교의 儀禮(의례) 내지 행동지침을 공부하는 한편,성현들을 기리는 祭享(제향)을 통해서도 그들의 가르침과 정신을 기르는 동시에 직접 교육을 맡아 참다운 유교인을 양성하였다.
중앙의 성균관은 文廟配享(문묘배향)과 함께 국립대학의 기능을 하면서 유교교육의 중심이 되어 국가 동량을 길러냈다.
서원이나 향교를 중심으로 한 인맥이나 學風(학풍) 형성은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덕을 쌓아 완전한 유교인으로서의 인격을 닦은 후 성현의 도를 국가사회에 구현한다는 면도 있었으나,출세의 한 방법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 21년(1884) 과거제도의 폐지로 儒者(유자)들의 一身榮達(일신영달)과 현실참여의 통로가 봉쇄되면서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유림은 해체의 길로 접어들고,일부 인사들에 의해 명맥만을 유지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儒學(유학)에서 중요시하는 仁(인),義(의),禮(예),智(지),名分(명분),淸廉(청렴) 등은 조선시대 내내 선비정신의 중추를 이루었다.이러한 선비정신은 丙子胡亂(병자호란:丙子年에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입해 일으킨 난)과 壬辰倭亂(임진왜란:壬辰年에 왜구,즉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입한 난)때에는 우리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의병들의 정신적 기조가 되기도 했다.
義(의)와 名分(명분),正道(정도) 등을 중요시하다 보니 옳고 곧은 말을 서슴지 않아 유배 등의 벌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중종 반정 이후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려다 반대파의 모함을 받고 전라남도로 유배(중종14년인 1519년)된 후 1개월 만에 賜藥(사약:賜 줄 사,藥 약 약,임금이 죄인에게 먹고 죽을 독약을 내려 주는 것)을 받고 죽은 조광조도 그 중의 하나였다.
박 교 선 교육부 연구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