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정민의 世說新語] [594] 고선포목 (枯蟬抱木)

bindol 2020. 10. 29. 04:58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규장각도서 장서인보’ 2책이 나왔다. 규장각 소장 고서에 찍힌 장서인만을 따로 모은 것이다. 반가워 살펴보니 유한준(兪漢雋·1732~1811)의 ‘자저(自著)’에 찍힌 큰 인장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인문(印文)이 ‘고선포목(枯蟬抱木)’이다.

고선(枯蟬)은 매미 애벌레가 성충이 되면서 나무 위에 벗어놓은 허물을 말한다. 선태(蟬蛻), 선각(蟬殼), 선퇴(蟬退)라고도 한다. ‘의림촬요(醫林撮要)’에 보면 선화무비산(蟬花無比散)과 선화산(蟬花散), 도인개장산(道人開障散) 같은 가루약에 쓰는 한약재로도 쓰인다. 매미 허물을 주성분으로 여러 약재와 섞어 가루 내어 복용한다. 눈이 짓무르거나 핏발이 설 때 증세를 완화시켜 준다.

박지원이 홍대용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 표현이 나온다. 이덕무와 박제가가 어렵게 벼슬길에 몸을 담게 되자 그것이 기뻐서 쓴 편지다. “이덕무와 박제가가 관직에 발탁되니 기이하다 말할 만합니다. 성세에 진귀한 재주를 품은지라 절로 버림받지 않은 게지요. 이제부터는 얼마 안 되는 녹이라도 얻게 되었으니 굶어 죽지는 않겠습니다. 사람에게 어찌 매미 허물이 나무를 끌어안고, 구멍 속 지렁이가 샘물 마시듯 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매미 허물과 땅속 지렁이는 아무것도 지닌 것 없는 빈한한 삶을 가리키는 의미로 썼다. 어둑해진 여름 초저녁, 매미의 성충이 한 발 두 발 나무를 딛고 나무 위로 올라온다. 어렵사리 등딱지를 째고 마침내 한 마리 매미가 그 속에서 나온다. 힘겹게 허물을 벗어난 매미가 선선한 저녁 바람에 젖은 날개를 펴서 말려 숲으로 날아가고 난 뒤에도, 바싹 마른 매미의 허물은 한동안 나무를 부둥켜안고 떨어질 줄 모른다.

마른 허물은 어째서 여전히 나무를 끌어안고 있을까? 온 힘을 쏟아 등의 터진 틈으로 성충을 내밀던 그 집중이 본체가 빠져나간 허물 상태에서도 무의식으로 남아 나무를 붙든 손을 놓지 않은 것이다. 그 안에 남은 에너지가 또 약재가 되는 것일 테고. 그걸 또 돌에 새겨 자기 책에 찍는 마음도 궁금하다. 자신의 정혈(精血)이 담긴 책이 사실은 이 매미 허물과 같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