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85] 쇼와 ‘바보 예산’
입력 2021.03.05 03:00 | 수정 2021.03.05 03:00
1987년 12월 다음 연도 예산안을 소개하는 대장성 기자회견장에서 주계관(主計官) 다야 히로아키(田谷廣明)는 ‘쇼와 3대 바보 예산(昭和三大馬鹿査定)’ 발언으로 화제를 모은다. 발언의 계기가 된 것은 도호쿠(東北), 호쿠리쿠(北陸), 규슈·가고시마(九州·鹿児島) 노선 등 소위 ‘정비(整備) 신칸센’으로 불리는 지방 신칸센 건설 예산이었다.
이들 노선은 해당 지역에는 숙원 사업이었으나, 국가 전체로는 우선순위가 높지 않았다. 철도 민영화, 재정 건전화 등의 과제를 안고 있던 대장성은 물동량, 기존 철도 활용도 관점에서 타당성이 떨어지는 신칸센 사업에 국가 재원을 우선 배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다야의 쇼와 3대 바보 예산 발언은 이러한 대장성 입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정비 신칸센 사업이 뜨거운 감자가 된 배경에는 정치권의 야합이 있었다. 그해 봄 집권 자민당은 나카소네 내각의 인기를 발판으로 의회 해산을 통한 의석수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를 가리지 않고 표심을 잡기 위해 공약으로 내건 것이 정비 신칸센 사업의 조속한 개시였다. 총선 후 연선(沿線) 지자체, 연고 정치인들의 공약 이행 요구가 분출하면서 이미 결정된 내각의 사업 연기 방침이 번복되고 정치권의 예산 반영 압력이 거세진 것이었다.
다야의 발언으로 정치적 이해관계로 타당성이 떨어지는 공공사업을 밀어붙이는 분위기에 제동이 걸리는 듯했으나, 그 효과는 길지 않았다. 몇 년 후 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압력으로 정비 신칸센 사업은 결국 첫 삽을 뜨게 된다. 관료의 견제 기능이 강하다는 일본에서도 정치 논리를 앞세운 방만한 공공사업이 국가 경쟁력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관료의 견제 기능은커녕 의회가 기본 절차마저도 무시하는 선거용 특별법을 제정해 공공사업을 밀어붙이는 나라의 미래 경쟁력은 어떠할지 근심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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