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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어느 봄날의 느린 성찰[출처: 중앙일보]

bindol 2021. 4. 28. 04:35

[마음 읽기] 어느 봄날의 느린 성찰

[중앙일보] 입력 2021.04.28 00:28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2021 교향악축제’가 있었다. 첼리스트 양성원과 코리안심포니의 협연이 있다 하여 지인을 통해 어렵사리 표를 구했다. 딱 한장 겨우 구해 들어간 음악회. 띄어 앉기를 했다손 치더라도 놀랍게도 만석이었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싶었다.
 

부질없는 것에 탐착하며 사는 삶
저마다 붙잡은 것만 놓으면 될 일
삶을 통제하는 이는 남 아닌 자신

어쨌든 명성으로만 듣던 양성원의 첼로 연주를 직접 듣게 되었으니, 가슴이 엄청 콩닥거렸다. 그런데 음악회가 시작되자 뜻밖의 일이 생겼다. 그리 기대하던 첼리스트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2층 맨 마지막 줄에 앉아있는 내게까지 전해지는 오케스트라의 진동이라니.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모든 세포와 감각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듯했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음악을 듣노라니, 머지않아 기다리던 첼로 연주자가 나왔다. ‘이제는 좀 초연하게 들어봐야지’ 하며,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그러나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어느새 등을 웅크리고는 두 손을 모으고 그의 고독한 선율에 빠져들었다. 인간의 울음소리와 가장 닮은 악기가 첼로라고 했던가. 하마터면 첼로 선율 따라 소리 내어 흐느낄 뻔했다. 마치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의 그 유명한 ‘새의 노래’처럼.
 
공연 후 나오면서 ‘첼로 선율에 흐느낄 만큼 내가 그동안 뭘 그리 힘들게 살았던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 암자에 주지로 온 이래 좋아하는 음악과 멀어졌구나 싶었다. 음악뿐만 아니라, 그간 허영심에 쌓아놓고 읽던 책들도 먼지가 푹푹 쌓이고, 일주일이면 한두 번씩 가던 서점도 더딘 연중행사가 되고 말았다. 더 이상 다정했던 벗들과 전화도 하지 않으며, 가끔은 치열하게 마주하던 마음도 챙기지 않는다. 왜 그랬지? 하면서도 ‘아, 그랬구나. 좋아하는 것들과 이리 단절되어 살고 있었구나.’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후의 허전함과 씁쓸함이란….
 
부질없는 것들에 탐착하며 사느라 아마도 나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나보다. 사찰 관리자가 되는 일에 치우쳐 절에 집착이 생겼고, 때문에 삶도 자유롭지 못하고, 평온하지 못했던가 보다. 예민한 듯하지만, 아둔한 나는 늘 이렇게 뒤늦게야 그걸 깨닫는다. 그 헛된 집착과 쓸데없는 소유욕을 놓아버리지 못한 채로 말이다.
 
리처드 바크의 『환상』이란 책이 있다. 맑은 강물 밑바닥에서 군락을 이루고 사는 생물 이야기다. 생물들은 각자 강 밑바닥에서 바위와 나뭇가지에 매달려 살았다. 뭐든 매달려 사는 것이 그들의 생활방식이었다. 이들 중에 매달려 사는 게 너무 싫었던 한 생물이 있었다. 그는 주위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린다.
 
손을 놓자 강 물살에 이리저리 부딪치며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그럼에도 매달리기를 거부하자, 강의 흐름은 그를 밑바닥으로부터 들어 올려 자유롭게 했다. 재밌는 것은 그다음이다. 멀리서 강물 위를 둥둥 떠오는 모습(밑에서 보면 하늘을 나는 듯함)을 본 하류의 강바닥 생물들이 기적이 일어났다며, 갑자기 그를 ‘메시아’라 부르더니, 자신들을 구원해달라고 외쳤다.
 
강물 위를 떠가던 그는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며, 그저 우리가 저마다 붙잡고 있는 손을 놓기만 하면 강물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거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강바닥 생물들은 이 말을 듣고도 꼭 붙든 손을 놓지 않고, 강물 위를 떠내려온 메시아의 전설을 만든다.
 
책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도 매달리고 집착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손만 놓으면 되는데, 매달리지만 않으면 되는데, 좋고 싫은 마음에 붙잡은 것들을 내려놓지 못한다. 더구나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면 뭔가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출가를 하든, 안 하든 이러한 삶의 속성은 비슷한 것 같다. 물론 형태면에서만 본다면, 출가자는 한번쯤 붙잡은 손을 놔본 사람들이긴 하다.
 
『환상』 속의 이런 글도 눈에 띈다.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 건강과 질환, 부유와 빈곤, 자유와 굴종에 대한 동의(同意)의 힘이 놓여있다. 이러한 것들을 통제하는 자는 바로 우리들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몽테뉴가 말하기를 ‘삶의 효용은 얼마나 오래 사는 지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지로 결정된다’고 했다. 인생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스스로 무엇을 부여잡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실은 나도 내가 뭘 붙잡고 사는지 잘 모르겠다. 내려놓는 것이 수행일 텐데…. 고난으로 시작하여 고난으로 끝나는 이 허망한 인생을 말이다.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출처: 중앙일보] [마음 읽기] 어느 봄날의 느린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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