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천구의 대학에서 정치를 배우다 <4> 高祖와 陸賈

bindol 2021. 5. 31. 16:16

- 높을 고(高-0)할아비 조(示-5)뭍 륙(阜-8) 값 가(貝-6)

陸賈(육가)가 漢(한) 高祖(고조) 劉邦(유방) 앞에 나아가 말할 때마다 '詩經(시경)'과 '尙書(상서)'를 들먹이자, 고조가 꾸짖듯이 말했다. "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어찌 '시경'이나 '상서' 따위를 섬기겠소?" 그러자 육가가 이렇게 대답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기는 했으나,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저 商(상) 왕조를 일으킨 湯王(탕왕)과 周(주) 왕조를 일으킨 武王(무왕)은 무력으로 천하를 얻었으나 이치를 따라 천하를 지켰습니다. 文武(문무)를 아울러 쓰는 것이 나라를 길이 보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옛날 吳(오)나라 왕 夫差(부차)와 晉(진)나라의 智伯(지백)은 무력만 지나치게 쓰다가 망했고, 秦(진) 제국은 형법만을 쓰고 變通(변통)하지 않은 탓에 결국 멸망했습니다. 만일 진 제국이 천하를 아우른 뒤에 仁義(인의)를 실행하고 옛 성인들을 본받았다면, 폐하께서 어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조는 언짢으면서도 부끄러워하며 육가에게 말했다. "나를 위해 진 제국이 천하를 잃게 된 까닭과 내가 천하를 얻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또 옛 나라들이 정치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한 까닭이 무엇인지 글을 지어 주시오."

이에 육가는 국가 존망의 징후에 대해 거칠게나마 서술하여 모두 열두 편을 지었다. 그가 한 편씩 올릴 때마다 고조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좌우 신하들도 만세를 불렀다. 그 책을 '新語(신어)'라 한다. 육가의 이 책은 지금도 전하고 있다.

흔히 創業(창업)보다 守成(수성)이 어렵다는데, 이는 창업은 한때의 책략만으로 가능하나 수성은 장구한 계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리라. 육가는 이를 잘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한 고조에게 무력과 책략으로써 천하를 차지할 수는 있어도 거대한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제국에 걸맞은 정치 철학과 제도, 방략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이제 한국을 보라. 오로지 경제성장을 지향하면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정과 모순, 부조리를 애써 외면해온 탓에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외교, 군사, 문화, 교육 각 방면에서 불평등과 차별 따위를 비롯한 갖가지 심각한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2016년의 '박근혜 게이트'는 그 縮圖(축도)라 할 만하다. 육가의 말투를 빌어 말하자면 이렇다. "경제로써 나라를 일으켰으나, 경제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융성하기 어렵다."

이제 참으로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치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