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이름 진(禾 - 5)효도 효(子 - 4)제후 공(八 - 2)
- 구할 구(水 - 2)똑똑할 현(貝 - 8)명령 령(人 - 3)
위혜왕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자 공손앙은 위나라를 떠나 서쪽으로 秦(진)나라에 갔다. 당시 진나라는 효공이 천하에 求賢令(구현령)을 내려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겨우 21세에 즉위한 효공은 진나라가 서쪽에 치우쳐서 중원의 제후국들로부터 오랑캐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을 원통하게 여기고 있었다. 즉위하자마자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는 등 널리 은혜를 베풀었고, 또 戰士(전사)를 모집하고 論功行賞(논공행상)을 분명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함을 느껴 구현령을 내린 것이다.
"옛날 穆公(목공)께서는 덕을 닦고 무력을 길러 동쪽으로는 晉(진)의 내란을 평정하여 황하를 경계로 삼았으며, 서쪽으로는 戎狄(융적)을 제압하여 땅을 천 리나 넓혔다. 천자는 方伯(방백)의 칭호를 내렸고, 제후들도 모두 축하했다. 후세를 위해 이런 업적을 남겼으니, 빛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러나 厲公(여공)과 躁公(조공), 簡公(간공), 出子(출자) 때엔 조용한 날이 없이 나라 안이 우환에 시달려 나라 밖의 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三晋(삼진, 魏·趙·韓)이 이 틈을 노려 河西(하서) 지역을 빼앗고, 제후들은 우리를 무시하니, 이보다 더한 치욕은 없었다. 헌공께서 즉위하여 변경을 안정시키고 도읍을 櫟陽(역양)으로 옮겨 다스리면서 동쪽 정벌을 통하여 목공 때의 땅을 되찾고 그때의 政令(정령)을 실행하려 했다 과인은 이런 선군의 뜻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빈객과 군신들 가운데 남다른 계책으로 우리 진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높은 자리를 내리고 땅을 나누어 줄 것이다!"
효공의 의지는 분명했다. 부국강병을 이룩하여 선대의 치욕을 씻고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능하고 현명한 인재들을 얻어야 했다. 정치의 득실과 일의 성패는 사람에게 달려 있고, 군주 혼자서는 결코 성취할 수 없다. 효공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구현령을 내렸던 것이다.
공손앙은 효공에게 발탁되기를 바라서 진나라로 갔다. 그러나 효공이 아무나 만나주지는 않을 것이므로 먼저 효공이 아끼는 신하 景監(경감)을 찾아갔다.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공손앙이 뛰어난 인재임을 알아챈 경감은 곧바로 효공에게 천거했다. 효공은 얼른 공손앙을 맞아들여 그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에 대해 물었다. 절호의 기회를 얻은 공손앙은 열심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효공이 꾸벅꾸벅 졸면서 제대로 듣지 않았다. 공손앙이 물러난 뒤에 효공은 경감에게 화를 냈다.
"그대의 빈객은 헛된 생각을 품은 망령된 사람이오. 어찌 쓸 수 있겠소?"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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