露冷驚秋夕 이슬이 차매 추석이 가까운 걸 깨닫고 雲飛戀故丘 구름 흘러가니 고향이 그리워지네 魚肥香稻熟 고기는 살찌고 벼는 익어가니 鳥宿翠林稠 숲이 우거진 곳에 새들이 깃들겠지 |
존경받을 어른들 포은 정몽주의 생애와 그의 학문관
5000여년의 우리 역사 속에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충신과 열사가 있었지만, 圃隱 鄭夢周 선생만큼 후세에 영향을 끼친 분은 없으며, 그 위상과 영향은 구한말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 특히 선유들은 한결같이 道學과 義理學의 學的 淵源이 포은선생에게서 기인한 것으로 여겼으며, 이는 靜庵 趙光祖(1482∼1519)의 學德을 기리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광조의 학문이 바른 것은 그 전수받은 바 유래가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개연히 求道에 뜻이 있어 金宏弼(1454∼1504)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김굉필은 金宗直(1431∼1492)에게서 배웠고, 김종직의 학문은 그 부친인 司藝 金叔滋 (1389∼1456)에게서 전해졌고, 김숙자의 학문은 고려의 신하 吉再(1353∼1419) 에게서 전해졌으며, 길재의 학문은 鄭夢周(1337∼1392)에게서 전해졌다. 정몽주의 학문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그 학문의 연원이 이러합니다. 즉 조광조의 학문적 연원이 ‘조광조 → 김굉필 → 김종직 → 김숙자 → 길재 → 정몽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학계의 일반적인 道統 관념으로, 포은선생의 사상사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용한 단서라 하겠다. 고려 말의 牧隱 李穡(1328∼1396)은 “달가(정몽주)의 논리는 횡설수설 이 모두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미루어 東方理學의 祖宗으로 삼는다.”2)고 하였으며, 高峰 奇大升도 포은선생을 가리켜, “고려 말기에 정몽주는 충효의 큰 절의가 있었고, 程朱의 학문을 배워 동방이학의 조종이 되었다.”3)고 평가하여, 포은선생을 충효의 절의뿐만 아니라 동방이학의 조 종으로서 추존되었던 것이다. 포은선생은 명문가나 귀족가문의 출신이 아니라 대대로 지방에서 살아온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시조는 신라 때 간관을 지낸 宗殷이다. 영일정 씨가 慶州府에 속해 있던 迎日(또는 延日)로 관향으로 삼게 된 것은 종은 이 언사로 폄출되어 후손 宜卿이 영일 지역의 호장으로 정착하면서 비롯되 었다. 포은선생은 고려 인종⋅의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鄭襲明의 후손 으로 알려지고 있다. ?高麗史?에 의하면 정습명은 기개가 탁월하고 외모가 훤칠하였다고 한 다. 그는 鄕貢으로 급제하여 내시부에 속했다가 인종 때에 여러 번 벼슬을 옮겨 國子司業 起居注 知制誥가 되었다. 정습명은 오랫동안 언관으로 있 으면서 바른 말로 서슴없이 간언하는 기풍이 있으므로 인종은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겨 태자의 스승을 삼아 東宮을 가르치게 하였다. 인종은 병이 위 독하자 의종에게 유훈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정습명의 말을 들어 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정습명은 선왕의 부탁을 받은 이후로 임금이 잘못 이 있을 때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의종이 그의 곧은 말을 꺼렸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金存中과 鄭諴 등이 밤낮으로 그를 謀陷하였는데, 마 침 정습명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의종은 김존중에게 그 직무를 임시로 대리 하게 했다. 이에 정습명은 임금의 의중을 알고 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아첨을 일삼는 사람들이 날마다 진출하고 왕도 더 욱 방자하게 되어 절도 없이 자기마음대로 정치를 전횡하고 놀이만 일삼는 지경이 되었다. 어느 날 왕이 歸法寺에 갔다가 말을 달려 獺嶺의 茶院까지 가서 본즉 시종하는 신하들이 아무도 따라 오지 못하였다. 왕은 홀로 기둥에 의지하며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정습명이 살아있었다면 어찌 내가 이렇게 행동하게 되었겠는가?”라고 후회하기도 하였다.4) 정습명 이후 그의 아들인 燮均과 손자인 謙牧은 한직인 同正職에 그쳤 고, 겸목의 아들인 麟信과 손자인 之泰 또한 한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포은선생의 증조인 仁壽, 조부인 裕와 아버지인 云瓘 역시 한직에 벗어나 지 못했을 정도로 그의 가문은 정습명의 후예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특징 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포은선생의 가계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5) 4) ?高麗史? 권98, 열전 제11, 鄭襲明. 5) 포은학회, 2007, ?포은선생집?, 한국문화사, 29∼30쪽 참조. 포은 정몽주의 생애와 그의 학문관⋅김인규 9 宗殷 ……… 鄭襲明 ──── 燮均 ───── 謙牧 ────── 麟信 (樞密院知奏事) (衛尉主簿同正) (內侍主簿同正) (太學博士) 之泰 ─────── 宗興 ─────────林 ───────── 仁壽 (典書,主簿同正) (進賢館提學) (奉翊大夫版圖判書) (檢校軍器監) 裕(直長同正) 夢周 ? 云瓘(成均館膺齋生) ? 谷山延氏(金吾衛大將軍 丹瑞女) ? 李氏(慶州) 永川李氏(膳官署丞 約女) 厚(司宰令) 蹈(司宰令) 過(禮曹判書) 宗誠(中樞院事) 宗本(成均司藝) 成翼之 李長得 韓承顔 <포은선생 정몽주 선생의 가계> 위의 도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습명 이후 정몽주 이전의 인물중 燮均 ⋅謙牧⋅之泰⋅仁壽⋅裕 등은 동정 내지 검교직을 지내고 있으며, 麟信 ⋅宗興⋅林은 태학박사⋅진현관제학⋅봉익대부 판도판서 등을 역임했 다.6) 포은선생의 字는 達可이고, 경주부 영일현 사람이다. 증조 仁壽는 봉익 대부 개성윤 상호군에 추증되었고, 조부 裕는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에 추증되었다. 그는 부친 云瓘과 모친 永川李氏 사이에, 1337년 12월 22일 永川郡 동쪽 亏[愚]巷里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7) 처음에 어머니 이씨 부 인이 임신하였을 때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놀라 떨어뜨린 꿈을 꾸고 깨어서 낳았으므로 夢蘭이라 이름 지었다. 그 뒤 9세에 이씨 부인이 낮에 검은 용 이 나무에 오르는 것을 꿈꾸고 나가 보니 몽란이었음으로 이때부터 夢龍이 라 이름을 고쳤다가 冠禮를 치르고 나서 夢周로 다시 개명하였다. 지원 3년 정축(1337) 12월 무자일(22일) 영천군 동쪽 우항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변한국부인이 임신 하였을 때,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놀라 떨어뜨린 꿈을 꾸고 놀라 깨어서 낳았으므로, 이름을 夢蘭이라 하였다.”12)에 의거하고 있다. 반면 포항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은, 1832년에 강행된 ?영일현읍지?에 “운 제산 아래 문춘동이 있으니, 전하기를 정몽주의 탄생지라 한다. 사당의 기초 석이 그대로 있고, 동쪽 10리 되는 곳 청림동에 정몽주의 옛 집터가 있다. 咸傅霖이 지은 「행장」에 정몽주는 경주부 영일현 사람이며, 중간에 영천에 살았다고 한다.”13)고 한 것에 의거하고 있다. 위의 문장에서 본다면 아무래도 포은선생의 출생지는 영천 우항리로 보 아야 할 것이다. 객관적인 자료에 있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것 이 1530년으로 가장 앞서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항에서 출생했다면서 주장 하는 “生於郡東亏項里”의 生字를 ‘낳았다’는 뜻이 아니라 ‘살았다’는 뜻 이라고 여기는 것도 다소 무리가 있다.14) 그렇다면 「烏川源派錄序」에 “昔 我先祖, 樞密院知奏事滎陽公, 生於烏川, 及其十世孫, 圃隱先生, 又 爲烏川人.”에서의 ‘生於烏川’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형양공이 ‘오천에서 살았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되어서 초연히 세상 밖의 의상이 있었다. 楊州에 자세히 보였다.”라고 하여 ‘居露陰山下’라고 하였으며, 같은 책 권25, 예안현 우거조에 “高麗禹倬ː舊 居, 在鼻岩南二里, 詳見丹陽郡人物.”라고 하였다. 또 같은 책 권10, 용인 현 우거조에 “李宗儉⋅李宗謙: 二人早退, 居南谷, 構孝友堂, 以山水自 娛.”, 권11, 파주목 우거조에 “李詹ː居童山下.”라고 하여, 한결같이 ‘살았 다’고 했을 때는 ‘居’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은선생의 경우 외가인 ‘영천 우항리’에서 태어난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유성룡의 「 연보고이」에 나타나 있듯이 분명해 보인다. 다만 포은선생의 고향을 영천으 로 보는 것은 새로운 논의가 필요할 듯하다. 앞에서도 지적 했듯이 선인들 중에 외가에서 태어난 예는 수없이 많다. 그 대표적인 인물을 들면 晦齋 李彦迪(1491∼1553), 西厓 柳成龍 (1542~1607), 율곡 李珥(1536~1584), 尤庵 宋時烈(1607∼1689) 등을 들 수 있다. 그리나 외가에 태어나 그곳에서 살든가, 외가에 태어나 본가로 돌 아와 살면 문제가 복잡하지 않다. 서애는 외가인 義城 사촌에서 태어나 바 로 본가에 와서 성장했음으로 당시나 지금이나 그를 의성사람이라고 하는 이는 없다. 반면 회재와 우암은 외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정착해 살았음으 로 회재의 고향을 경주 良洞, 우암의 고향을 충청도 옥천이라고 부르고 있 다. 그러나 율곡은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나서 9세 때까지 살다가 본가인 파주에 와서 살았다. 일부 강릉 지방의 인사들이 율곡의 고향을 강릉이라고 해서 강릉과 파주간의 미묘한 신경전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율곡의 고향을 파주라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포은선생처 럼 외가에서 태어나 본가에 와서 살다가 다시 외가에 가서 살았다는데 문제 가 있다. 그러므로 포은선생 자신도 <저성역의 밤비[諸城驛夜雨])>라는 시 에서 “영주 들판 논에는 벼가 잘되고/ 오천에는 먹을 만한 고기가 있어/ 나 에게 두 가지가 모두 있건만/ 돌아가는 글은 짓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였으 며, <홍무 정사년에 사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서 지음[洪武丁巳奉使日本 作-十二首]>이라는 12 수 중 세 번째 시에서도, “섬나라에 봄빛이 움직여 오니/ 하늘 끝 나그네는 가지 못하네/ 풀빛은 천리에 이어 푸르고/ 달빛은 포은 정몽주의 생애와 그의 학문관⋅김인규 13 두 고향에 함께 밝았겠지.”라고 하여, 영천과 오천[영일]을 두 고향으로 여 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故鄕의 사전적 의미는 ①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②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③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④ 어떤 사물 이나 현상이 처음 생기거나 시작된 곳 등 4가지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③과 ④는 ‘마음의 고향’과 ‘판소리의 고향’ 등과 같이 사람과 지역간의 직접적인 연관이 없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고향은 ①과 ②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의미여야 할 것이다. 만약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만 한정한다면 조상 과의 단절의 의미하게 되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만 한정한다면 오늘 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고향이라는 의미는 퇴색되기 때문이다. 특히 포은선생의 고향을 영천으로 한정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야기된다. 기존의 사료에 의거한다 하더라도 포은선생은 외가인 영천에서 태어나, 어 머니 산후조리 후 본가인 오천으로 와서 살다가, 다시 9세 때(?)부터 26세 때 예문관 검열에 임명될 때까지 살았다 하더라도 불과 16여년 밖에 영천에 서 살지 않았다는 계산이 된다. 물론 성장기에 살던 곳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칠 수는 있었을지라도, 그 사실만으로 영천을 고향을 단정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오히려 ?신증동국여지승 람?의 편집방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는 포은선생을 <영천군>의 우거란에 기재한 점이다. ‘우거’란 사전적 의 미로는 글자 그대로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붙여 사는 것’이다. 즉 포은선생은 영천의 외가에서 임시로 몸을 의탁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예는 조선시대만 한정해 보더라도 허다하다.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처가살이는 일반화 되었으며, 아예 처가에 늘러 앉아 그 곳에서 터전을 잡아 가문을 번성시킨 경우도 하다하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앞에서 든 회재와 우암의 경우라 하겠다. 또 경기도 여주가 관향인 여주이씨가 기묘사 화를 피해 한양에서 밀양의 처가로 移居해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세거지 로 정착한 후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처가의 제사를 받들고 있으며, 경주의 양동 마을도 원래는 월성손씨 집성촌이었는데, 鷄川君 孫昭의 사위인 회재 14 圃隱學硏究 第3輯 李彦迪 선생이 태어나 살면서부터 월성손씨와 여주이씨가 나란히 번성한 마을이 되었다. 또 충남 논산 가야곡면의 경우 원래 문화류씨 집성촌이었는 데, 18세기 이후 사위인 파평윤씨가 처가살이를 하면서부터 윤씨의 자손은 번성하였던데 비해 상대적으로 류씨의 자손은 귀한 관계로 현재는 류씨문 중 보다 윤씨문중이 더 번창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 포은선생을 영천의 인물란에 기입하지 않고 우거란에 기입한 까닭은 포 은선생의 고향이 영천이 아니라 포항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포은선생의 고향이 포항이라는 것은 함부림이 쓴 포은선생의 행장에도 “공의 성은 鄭이고, 휘는 夢周이며, 자는 達可, 호는 圃隱, 경주부 영일현 사람이다.”15)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貫鄕만을 표기한다면 일반적으로 ‘경주인’ ‘김해인’ 등과 같이 ‘迎日人’으로 쓰는 것이 마땅하다. 굳이 行狀 에서 ‘경주부 迎日縣人’이라고 기록한 것은 영일현에서 살았다는 것을 의 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은선생은 영천군 우항리에서 태어나셨으나 어디 까지나 선생의 고향은 영일[오늘날 포항]로 해야 옳으며, 굳이 영천을 고향 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제 2의 고향으로 해야 할 것이다. 3. 포은선생의 학문정신과 그의 고향의식 포은선생의 학문은 특별한 師承 관계없이 독학으로 自得한 것으로서16), 그의 평범하지 않은 학문적 도량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유학의 기본경전인 ?사서?와 ?오경?을 통하여 聖賢의 오묘한 이치와 求道精神을 터득하였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言說이 적은 관계로 선생의 학문을 종합적으로 구성 해보는 것은 어렵다. 다만 선생이 기존의 詞章學 중심의 학계 분위기를 실 천적 성향이 강한 경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하겠다. 포은선생은 사장학보다 經學에 주력하였으며, 그 결과 과거에서[공민왕 9년, 1360] 三場을 연이어 장원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의 경학적 소양이 매우 깊었음을 반증한다. 삼봉 鄭道傳(?∼ 1398)은 포은선생이 ?사서? 뿐 만 아니라 ?주역?⋅?시경?⋅?서경?⋅?춘추?와 같은 유가경전에 매우 정 통했다고 언급했다.18) 이는 바로 유학의 이념을 중시한다는 의미로, 정치에 있어서 유학을 기본이념으로 한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은선 생은 경학을 정치의 요체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의 모순들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포은선생은 경학을 바탕으로 당시의 불교와 도교 등 이단의 배척하는 闢異端 정신은 포은선생의 학문정신이라 하겠다. 포은선생은 이단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본심이 허령함을 깨 달아 邪心을 버리고 올바른 마음을 가져야 함을 물론 이론무장도 필요했다. 이 두 가지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경전이 바로 ?주역?이었다.19) 특히 ?주 역?은 ?대학?⋅?중용?과 더불어 성리학의 주요 텍스트이다. 이러한 서적을 바탕으로 포은선생은 理學을 자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이단을 배척하는 주요한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 그는 성리학의 理一分殊로서 불교를,20) 또 <湖中觀魚>이라는 시를 통해 장자[도교]의 제물론을 비판한다.21) 유학은 무엇보다 명분을 중시한다. 일찍이 공자는 춘추시대의 사회적 혼 란을 명분이 바로잡히지 않음으로써 야기된 것으로 보았다. 명분을 바로 잡 는 ‘正名’이랴 말로 정치의 선결과제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정명’이란 사회의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공자 는 정치의 근본은 정명에 있고, 정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爲政’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위정’이란 정치적⋅사회적 질서와 조화가 실 현되는 것으로, 이는 올바른 인간관계의 형성을 통해 실현되며, 올바른 인간 관계는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여 서로 화합할 때 이루어진다. 공자의 정명론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 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 父父子子]”22) 는 말로 표현된다. 모든 사회적 지위, 즉 ‘名’에는 그에 ‘합당한 몫’, 즉 ‘分’이 따른다는 것이 다.23) 공자가 볼 때 군신과 부자의 질서와 명분, 나아가 사회 질서는 각자가 자기의 명분에 해당하는 역할을 실현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점 에서 공자가 말하는 正名은 단순히 ‘직위의 고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명론은 오히려 그 직위에 부합하는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그것을 시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공자가 명분을 바로잡기 위한 방편의 하나 로 편술한 것이 바로 ?春秋?였다. 이에 司馬遷은 ?춘추?를 평하기를 “위 로는 三王의 도를 밝게 하고, 아래로는 인사의 기강을 판별하게 혐의를 구 별하며, 시비를 명백히 하고, 의혹을 정하여 善을 선이라 하고, 惡을 악이라 함으로써 역사적 포폄을 가하여 사회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고 하였 다.24) 이처럼 공자는 정명을 확립하기 위한 방편으로 ?춘추?를 저술하여 위로는 삼왕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사의 기강과 시비선악을 판별하여 사회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도 “나를 아는 자 도 ?춘추?며 나를 죄줄 자도 ?춘추?다.”25)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춘추정신은 한 시대의 난세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치세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하여 현실을 보다 새로운 방향과 국면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26) 공자 의 춘추의리사상은 공자 이후, 동방 사회에 있어서 역사의식 형성의 사상적 기초가 되어 왔으며, 이는 곧 현실비판과 이상 추구의 典範이었다. 춘추는 무엇보다 스스로의 주체성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며, 그 토대 위에 인간다 운 삶과 문명한 사회를 성취하면 그것이 바로 문화적인 세계이다. 포은선생 은 <겨울밤에 ?춘추?를 읽다[冬夜讀春秋]>라는 시에서 이러한 점을 극명 하게 보여준다. 仲尼筆削義精微 공자가 筆削한 의리가 정미하니 雪夜靑燈細玩時 눈 오는 밤 푸른 등불 아래 세밀히 음미하네. 旱抱吾身進中國 일찍이 이 몸을 이끌고 중국에 나아갔는데 傍人不識謂居夷 주위의 사람들 이를 모르고 이적에 산다 하는구나.27) 공자가 ?춘추?의 뜻을 편 필법은 힘의 강약에 따르지 않고 周禮에 따라 名實을 바르게 하고, 利害를 논하지 않고 是非를 논하여 가리고, 문자로서 是非善惡의 행위를 칭찬하고 폄하하여 이로서 正義와 公理를 펼치고자 한 것이다.28) 춘추정신은 중국과 이적을 종족이나 지역이 아니라 문화의 성취 여하에 따라 분류한다. 따라서 포은선생은 공자의 춘추정신을 깊이 탐 구하며 중국의 문명에 도달하고자 한 자신의 주체적 실천을 주변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음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토로하고 있다. 곁의 사람들은 ?춘추? 가 숭상하는 것이 중국이라는 지역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여, 중국 지역의 것은 옥석을 불분하고 무조건 중화요, 변방의 것도 역시 옥석을 불분하고 무조건 이적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포은선생의 입장은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의 지역에 관계없이 문명인 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을 펼쳐 보인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태도가 ?춘추? 의 본의에 걸맞은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단순한 지역적 구별이 아니라, 그 집단의 문명 숭상 여부에 따라 문명과 야만을 분변하는 것이 정당한 자세라 하겠다. 문화적 선진성과 윤리적 가치기준에 입각한 華夷論은 그 본질 속에 개방 성을 내포하게 되었고, 이적을 포함한 새로운 大一統의 모습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진리의 보편성을 인식하고 공자의 춘추정신을 잘 이해하였던 포 은선생은 주변의 잘못을 비탄한 심정으로 지적하며 이의 시정을 암시하는 태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포은선생 선생은 무력으로 고려 를 복속하였던 원나라를 배격하고, 仁義禮樂의 인도주의를 표방한 명나라 를 승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29) 이러한 포은선생의 처사는 예의로 문명질 서를 유지한다는 尊王攘夷思想에 입각한 것으로, 이때의 王이란 人道의 중화문화이고, 夷란 仁義文化가 결여된 야만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중화 문화란 典章과 禮樂이라는 형식은 물론 더 나아가 仁義를 베풀어 백성의 삶을 보호하고 안정되게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문물이 성대하고 제도가 갖추어져 백성의 삶과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문화인가, 그렇지 못한 가 하는 차이가 화이의 기준이 되며, 이러한 가치관에 따라 원나라와 명나라 에 대한 대응자세가 결정되었던 것이다.30) 특히 포은선생은 춘추의리정신을 몸으로 실천한 분이다. 일찍이 자신의 29) 이에 대해 우암 송시열은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따르도록 하였으며 중국의 제도 로써 오랑캐 풍속을 바꾸게 해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중국에 속한 나라가 되게 해서 울연히 예의의 나라로 만들었으니 선생의 큰 공이 아니겠는가”.(?圃隱集?, 續錄, 권2, 「神道碑銘」(宋時烈) “其斥胡元歸皇朝 用華制變胡俗 使我東土爲中國之屬國 而 蔚然爲禮義之邦者 是非先生之大功乎.”라고 하여, 포은선생의 처사를 높이 평가하였다. 지공거인 김득배가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회복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 웠음에도 도리어 金鏞에게 謀害되어 尙州에서 梟首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이에 포은선생은 義憤을 참지 못하고 임금에게 상소하여 시신을 거두고 제 사를 올리기 위해 상주로 가겠다고 하자, 공민왕은 포은선생에게 혹 祭文에 탈이 잡히면 죽임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고 하자, 포은선생은 “사람이 의롭 게 살다가 의롭게 죽는 것은 永生을 얻는 것”이라 답하고, 상주로 가서 시신 을 거두어 장례지낸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특히 그는 위의 제문에서 김득배 가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것은 하늘의 올바른 이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비록 죄가 있다고 하더라고 나라에 세운 공으로 덮어주 어야 하거늘 그렇게 하지 못하는 당시 상황에 안타까워하고 있다.31) 이와 같은 포은선생의 태도는 그의 의리정신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32) 그러나 포은선생 가장 선생답게 한 것은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데 있다. 그는 죽임을 당하기 얼마 전 친하게 알고 지내던 스님이 찾아와 “세상이 다 변해가는 데 왜 그리 苦節을 고수하려는가?”라고 묻자, 이에 답하기를 “남의 사직을 맡은 사람이 어찌 두 마음을 품을 수 있겠는가? 나의 갈 길은 이미 정해졌다.”33)고 하여, 춘추의리에 입각하여 不事二君의 절의를 끝까 지 보여주었던 것이다. 일찍이 양촌 權近(1352~1409)은 포은선생의 절의를 襃獎할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자고로 국가를 가진 자는 반드시 절의 있는 선비를 포창하니, 만세의 綱常을 굳게 하자는 것입니다. 王者가 義를 들어서 창업할 때 자기를 좇는 자는 상을 주고, 좇지 않는 자는 죄를 주는 것이 진실로 의당한 일이오나, 대업이 이미 정하여져서 수성할 때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前代에 절의를 다한 신하를 상주어, 죽은 자는 벼슬을 追贈하고, 살아 있는 자는 불러 써서, 아울러 旌表와 賞을 가하여 후세 人臣의 절의를 장려하나니, 이것은 고금의 통한 의리입니다. ⋯⋯ 가만히 보건대, 前朝의 시중 정몽주가 본래 한미한 선비로 오로지 태상왕의 薦拔의 은혜를 입어 서 大拜에 이르렀으니, 그 마음이 어찌 태상왕께 후히 갚으려고 하지 않았겠으며, 또 재주와 식견의 밝음으로써 어찌 천명과 인심이 돌아가는 곳을 알지 못하였겠 으며, 어찌 王氏의 위태하고 망하는 형세를 알지 못하였겠으며, 어찌 자기 몸이 보전되지 못할 것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섬기던 곳에 마음을 오로지하고 그 절조를 변하지 않아서 생명을 잃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이른 바 大節에 임하여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34) 양촌의 평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포은선생은 재주와 식견이 당시의 형세는 물론이고 자신의 한 몸을 바친다고 해서 고려가 지탱될 수 없음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최고 책임자로서 나라의 운명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사직을 위해 몸을 던진 데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유교에 서 추구하는 殺身成仁의 대의를 위해 殉道한 것이라 하겠다. 아울러 그의 精忠大節은 유교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인간의 생명보다 더 고귀하다는 것 을 실지로 보여준 것이다.35) 이것이 바로 綱常義理이며, 春秋大義인 것이 다.36) 그렇다면 포은선생의 시에 나타난 고향의식은 어떠했는가? 이미 앞에서 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저성역의 밤비[諸城驛夜雨]><홍무 정사년에 사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서 지음[洪武丁巳奉使日本作-十二首]>이라는 12 수 중 세 번째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먼저 <저성역의 밤비>에서는 今夜諸城驛 오늘 밤 저성역에서 胡爲思舊居 고향 생각 왜 나는지 遠遊春盡後 봄 다 간 뒤에 멀리 와서 獨臥雨來初 첫 비 올 때 홀로 누웠네. 永野田宜稻 영주 들판 논에는 벼가 잘되고 烏川食有魚 오천에는 먹을 만한 고기가 있어 我能兼二者 나에게 두 가지가 모두 있건만 但未賦歸歟 돌아가는 글은 짓지 못하는구나.37) 라고 하여, 들판이 넓은 영주는 벼가 잘 된다고 하였으며, 바닷가인 오천(포 항)에는 먹을 만한 고기가 잡힌다고 하여 영주와 포항을 다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홍무 정사년에 사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서 지음>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은 바 있다. 水國春光動 섬나라에 봄빛이 움직여오니 天涯客未行 하늘 끝 나그네는 가지 못하네. 草連千里綠 풀빛은 천리에 이어 푸르고 月共兩鄕明 달빛은 두 고향에 함께 밝았겠지. 遊說黃金盡 유세에 황금은 다 떨어지고 思歸白髮生 돌아갈 생각에 흰 머리만 생겨나네. 男兒四方志 남아로서 사방에 뜻 둠이 不獨爲功名 오직 공명만을 위함은 아니리.38) 즉 포은선생은 위의 시에서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심정을 노래 하면서, ‘달빛은 두 고향에 함께 밝았겠지’라고 하여, 자신의 고향을 두 곳이 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포은선생은 영천과 포항을 다 고향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海上孤城草樹荒 바닷가 외로운 성 초목은 황량한데 最先迎日上扶桑 부상에서 뜨는 해를 맨 먼저 맞이하네. 我來東望仍搔首 내가 올 때 동녘 보며 시름하였지 波浪遙應接故鄕 저 파도 틀림없이 고향에 닿았으리. 이 시는 포은선생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 산동성에서 지은 시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즉 타국에 가서도 해가 뜨는 것으로 보고 고향인 동쪽을 향해 머리를 긁적이며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 이다. 특히 이 시의 둘째 연에 ‘해를 맞이한다’는 ‘迎日’은 단순히 해를 맞이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시의 후반부로 가면서 포은선생의 고향인 ‘迎日’과 중 의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고향의 이미지로 전환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다음의 시를 보면, 露冷驚秋夕 이슬이 차매 추석이 가까운 걸 깨닫고 雲飛戀故丘 구름 흘러가니 고향이 그리워지네. 魚肥香稻熟 고기는 살찌고 벼는 익어가니 鳥宿翠林稠 숲이 우거진 곳에 새들이 깃들겠지40) 南國干戈尙未休 남쪽 난리 아직도 그치지 않아 七年不到故園遊 고향 땅 칠 년이나 가지 못했네. 風流御史斷腸處 풍류 아는 어사의 애끓는 곳은 落日江山明遠樓 강산에 해지는 명원루라네.41) 라고 하여, 첫 번째 시는 타향에서 ‘고기가 살찌고 벼가 익어가는’ 고향인 영천의 추억을 읊은 것이다. 특히 명절은 벗들과 더불어 우정을 나누기에 좋은 때로 추석이 다가오자 불현듯 고향의 벗들이 그리워 지은 것이다. 그리 고 두 번째 시는 포은선생이 39세 되던 1375년에 원나라와의 외교적 문제로 언양으로 귀양갔다가 41세 때인 1377년에 해금되어 서울로 돌아왔으므로 아마도 이 시기의 전후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특히 이 시에서는 7년 동안 고향 영천을 찾지 못했다는 고백과 함께 명원루에서의 풍류를 잊지 못한다 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고향과 관련하여 지은 시가 여러 首 있으나 포항과 영천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것은 아니며, 다만 막연하게 타향이나 타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이처럼 포은선생의 의식세계에서는 포항과 영천 모두 고향으로 자리 잡 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아 포은선생의 고향이 어디냐 가 문제인 것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후학들의 관점에서 의 문제이며, 포은선생의 의식세계에는 포항과 영천 모두 같은 고향이었다. 굳이 포은선생의 고향을 후학의 입장에서 따지자면 앞에서 영천에서 출생 하여 일정기간 성장하였지만 고향은 포항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的確할 것 으로 보인다. 4. 맺음말 이상에서 포은선생의 출생과 고향, 그리고 그의 시에 나타난 고향의식과 학문정신에 대해 살펴보았다. 포은선생의 고향은 후학들의 관점에서 보면 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통해 본 선생의 고향의식은 영천과 포항 모두 의식세계에 고향으로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선생은 영천과 포항 을 분리해서 보지 않고 동일하게 고향으로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독학으로 성리학의 奧旨를 자득하였으며, 이 를 통해 도교와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의 근본이념이 학계와 정계로부터 민간의 풍속이나 신앙⋅복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젖어들게 하여, 종 래 불교가 차지하고 있던 지위를 대체하게 하는 闢異端과 扶正學의 정신 으로 일관 하였던 것이다.42) 그러나 선생의 학문정신은 ?춘추?를 바탕으로 한 春秋義理精神이라고 하겠다. 선생은 中華와 夷狄의 구분이 지역에 따 라 결정되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다운 삶과 문명한 사회를 성취하면 것이야 말로 주체성의 발로이며, 문화민족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선생은 이러한 화 이관을 바탕으로 親明 정책을 시행하였으며,43) 춘추의리을 바탕으로 죽음 보다 더 고귀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포은선생의 綱常義理을 두고, 문인이었던 雪峰 朴信(1362~1444) 은 “국가가 위태롭고 망하여 갈 때 綱常을 白日에 드높이고, 名敎[명분]를 만세에 세워서, 威武로도 굽힐 수 없고, 刀鋸[칼과 톱]로 바꾸게 할 수 없는 것은 천하에서 고금에 권려하여야 마땅할 것”44)이라고 하여 높이 평가하였 던 것이다. 선생의 강상의리는 훗날 국난이 있을 때마다 선비들의 삶의 指 標가 되었으며, 만세의 師表가 되었던 것이다. 포은선생은 生時는 물론 사 후에 ‘東方理學之祖’, ‘淵源節義兩堪宗’이라 하여, 선⋅후배 학자들로부 터 학문과 절의에 있어서 으뜸이 된다고 평가 받았다. 이러한 포은선생의 학문과 절의에 대해 우암 송시열은 神道碑에 다음과 같이 읊었다. 春秋大義 炳如日星 춘추의 대의가 해와 별처럼 밝았다가 未盡底蘊 天柱忽傾 그 포부 다하지 못한 채, 천주가 갑자기 무너지고 其身旣沒 其道益壽 몸은 이미 가셨으나, 그 도 더욱 영원하여 若山有岱 如北有斗 마치 태산과 같고, 또 북두와 같았네 ⋯⋯ ⋯⋯ 若宋濂翁 始建圖書 송나라의 염계가 태극도설 처음 세워 以授關洛 以傳閩甌 관락으로 민구로 전수함과 같았다 此殆天啓 統會宗元 이는 필시 하늘에 근본이 모이게 하여 凡我後學 永溯其源 우리 후학들이 길이 연원 찾게 한 것이다.45) 즉 송시열은 포은선생의 춘추대의가 해와 별처럼 영원하여 태산과 같고 북두성과 같으며, 그가 자득한 성리학은 후학들의 연원이 되었다고 칭송하 였다. 이러한 그의 빛나는 절의는 그의 학문관에 있어서 闢異端의 비판정 신과 扶正學의 춘추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