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무능한 권력자가 선한 동기로 일 벌일 때 재앙이 닥친다

bindol 2021. 7. 16. 10:42

무능한 권력자가 선한 동기로 일 벌일 때 재앙이 닥친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1969년 4월 베이징에서 중공 제3차 전국대표대회가 진행될 때, 중국의 농촌에선 농민들이 모여서 마오쩌둥의 어록을 읽고 있다. 초상화 밑의 문구: “경국 당 9차 대회 개최 승리! 새롭게 드높이 철학을 선양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활용하자!”/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46회>

 

정치가 과연 선악의 대결일까?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진영이든 스스로 옳다고 믿기에 목숨 걸고 싸움을 한다. 한 진영에 속해서 다른 진영을 보면 모두가 악의 무리로 보일 수도 있다. “착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나쁘다” 욕하며 싸우는 아이러니다. 정치는 어쩌면 선악의 대결이 아니라 선의(善意)의 충돌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권력자의 선한 동기’를 맹신하고 칭송한다. 현명한 사람들은 ‘권력자의 선한 동기’를 의심하고 경계한다. 무능한 권력자가 선한 동기만 믿고, 무책임하게 검증도 없이, 역사의 교훈도 전문가의 조언도 무시한 채, 제멋대로 신나서 큰일을 벌이면 곧 재앙(災殃, disaster)이기 때문이다.

‘선한' 영도자의 조급증이 가장 위험

1950-60년대 중공중앙 통치의 키워드는 한 마디로 “더 빨리!(多快)”였다. 특히 대약진운동(1958-1962)이 시작되던 1950년대 말 마오쩌둥은 단기간 큰 성과를 내야 한다는 병적인 조급증에 시달렸다. 최고영도자가 인민의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선한 동기로 조급증을 부렸기에 중앙정부는 거세게 지방정부를 압박했다. 상부의 비위를 살피는 지방의 관료집단은 경쟁적으로 비현실적인 목표치를 제시했다. 피라미드 관료구조의 낙수효과에 따라 책임은 단계적으로 하위 조직에 전가됐다.

결국 맨 밑바닥의 간부들이 총대를 멨다. 상부에서 떨어지는 생산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그들은 현장의 생산 대중을 모욕주고 구타하고 혹사시켰다. 최대 4500만 명을 희생시킨 인류사 최대의 대기근은 바로 마오쩌둥의 조급증에서 비롯됐다. 홍콩 대학의 프랑크 디퀘터 교수가 대약진운동의 참사를 기록한 저서를 “마오의 대기근(Mao’s Great Famine)”이라 명명한 이유다. 대기근의 원인이 바로 “마오”라는 이야기다.

<“고도 생산의 위성이 영원히 하늘에서 날도록 하자!” 대약진운동 당시 단기 발전의 조급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공공부문>

“대약진”이 “대기근”으로 귀결됐음에도 마오쩌둥은 변하지 않았다. 막후에서 치밀하게 문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후, 마오쩌둥은 곧 “더 빨리!”를 외쳤다. 그는 조반파 혁명대중이 들고 일어나 중공 “사령부”의 “수정주의 주자파 당권파(黨權派)”를 축출하면, 곧 문혁을 종식할 생각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면, 1967년 “천하 대란”을 일으켜서 ‘주자파 수정주의 당권파”를 몰아낸 후, 1968년부터 천하 대치(大治)를 이룬다”는 계획이었다. 이미 그는 “[1966년] 제1년차에 문혁을 개시하고, 제2년엔 기초를 놓고, 제3년차엔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3개년 속성 혁명의 비전을 제시했었다. 그는 늘 그렇게 단기(短期) 혁명의 강박증에 시달렸다.

마오의 반격 “조반파를 타도하라!”

상황은 그러나 쉽게 풀리지 않았다. 1967년 봄부터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또 곳곳에선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경제는 곤두박질치며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해 7월 우한의 “7·20사태” 현장에서 마오쩌둥은 보수파 대중조직 백만웅사(百萬雄師)의 폭력 시위를 피해 급히 피신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8월 22일 베이징의 조반파 홍위병에 의해 영국 대사관이 불타는 사태까지 겹쳤다.

<“중국을 자게 내버려두라. 일어나면 세계가 애석해 하리니, 나폴레옹” 1958년 12월 1일 타임(Time) (왼쪽). “혼돈의 중국,” 1967년 1월 13일 타임(오른쪽).>

이미 1년 전부터 마오는 장장 8개 월 간의 외유를 마치고 베이징에 복귀 즉시 “조반유리(造反有理)!”를 외쳤다. “반란이 정당하다”는 이 한 마디는 10대 홍위병의 심장에 불을 질러 베이징 홍팔월(紅八月)의 학살극을 직접 초래했다. 로봇 병정들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마법사의 주문(呪文)과도 같았다. 그 이후 1년 간 무정부적 혼란이 이어졌다. 사분오열된 “혁명군중”이 무장투쟁에 돌입했고, 군대가 투입되자 더욱 광범위한 대중조직의 군사화가 전개됐다. 당시 중국의 여러 곳은 실제적인 내전이었다. 마오가 예견했던 “천하대란”은 무정부의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바로 이때 마오는 그가 직접 키운 조반파를 쓰레기 처분하듯 버리기로 했다. 실로 무서운 계략이었다.

극좌세력 제거 플랜 ‘청사(淸査) 5.16운동'

삼장법사(三藏法師)는 관음보살에게 “정심진언(定心眞言)”을 전수받았다. 삼장법사가 “정심진언”을 욀 때면 제멋대로 날뛰던 손오공(孫悟空)의 머리에 묶인 긴고아(緊箍兒)가 조여졌다. 이른바 긴고주(緊箍呪=정심진언)는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다스리는 비장의 심술(心術)이었다.

 

1967년 8월, 마오쩌둥에게도 긴고주가 필요했다. 손오공처럼 날뛰는 조반파를 제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수 문혁사가들은 마오쩌둥의 긴고주가 바로 “청사 5.16 운동”이었다고 해석한다.

1967년 8월부터 시작되어 1970-71년 최고조에 달했던 “청사 5.16 운동”은 1972년 일단 멈춰 섰으나 그 여파는 1976년까지 이어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일설에 의하면 1천만 명이 조사를 받고, 그 과정에서 10만 명이 박해당해 사망했다. 왕리의 회고록에 따르면, 1천만 명 중에서 350만 명이 구속됐다.

그 규모에 비해 이 정치운동의 시작은 미약했다. 1967년 5월 17일 중앙 기관지에는 “5.16통보”가 실렸다. 바로 1년 전 베이징 중공중앙이 채택한 문혁의 강령성 문건이었다. 어쩐 일인지 1년 만에 극비에 부쳐졌던 “5.16통보”가 공개되자 베이징 철강학원엔 “5.16 병단”이 형성됐다.

<1967년 5월 17일 중공의 대표적 기관지 <<인민일보>>, <<해방군보>>, <<홍기>>에 1966년 5월 16일 채택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이른바 “5·16통지”의 전문이 게재됐다.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통과된 이 통지는 문혁의 시작을 알리는 공식적 선언문이었다. 이 통지의 게재를 정치적 신호로 인지한 베이징의 조반파는 “5.16병단”을 조직하고 저우언라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이미 밀려난 후,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를 다음 표적으로 삼아 공격을 개시했다. 베이징 외국어 학원의 “6.16병단”이 저우언라이를 군부 장성들의 중앙에 도전했던 이른바 “2월 역류(逆流)”의 검은 배후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곧 “수도 5.16 홍위병단”이라는 연합체를 구성한 후 본격적으로 저우언라이를 수정주의로 몰아가는 정치투쟁에 나섰다.

이들의 활동은 8월 초까지 이어졌다. 1967년 8월 8일 이들은 베이징시의 주요 중심가에서 다섯 가지의 전단을 뿌리면서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소규모 군중조직이었다. 게다가 그해 7년 8, 9월 “수도 5.16 병단”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구속됐다. 9월 10일, 공안부장 셰푸즈(謝富治, 1909-1972)의 발언에 따르면, “5.16병단”은 불과 50명 정도였으며, 그 중 진짜 악당들은 10여명 정도며, 배후에 주자파가 있을 수도 있는” 그저 작은 사건일 뿐이었다.

마오의 ‘손오공 옥죄는 삼장법사의 긴고주(緊箍呪)’

지난 <45회>에서 우리는 중공 기관지 <<홍기(紅旗)>>의 편집위원으로 맹활약했던 문혁 3대 선동가 왕리, 관펑, 치번위의 처참한 몰락을 보았다. 1966년 가을 마오는 극좌의 선동을 이어가던 이 세 명을 치밀한 계획에 따라 차례로 날렸다. 그들은 문혁 초기 마오쩌둥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했던 공식적인 마우스피스(mouthpiece)였다. 마오의 입장에선 절묘한 한 수였다. 왕-관-치가 반혁명분자로 몰리는 순간, 그들의 극좌 선동에 놀아나던 조반파 혁명군중은 자동적으로 반혁명세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즈음 마오쩌둥은 베이징 시정부에서 베이징 사범대학의 조반파가 “5.16분자”일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받았다. 마오쩌둥은 “이건 좋아!”라는 한 마디 의미심장한 비시(批示)를 내렸다. 마오가 앞장서서 그 조반파 혁명군중을 버리는 순간이었다.

<1966년 가을 톈안먼 광장에 결집해서 마오쩌둥 어록을 손에 들고 흔들고 있는 홍위병의 모습. 문혁사가들은 흔히 마오쩌둥과 홍위병의 관계를 삼장법사와 손오공에 비견한다./ 공공부문>

삼장법사가 긴고주를 욀 때마다 손오공은 깨지는 두통을 느끼며 데굴데굴 굴렀다. 마오가 “5.16분자들”에 대한 저주를 쏟아내자 조반파 혁명군중은 “5.16분자”의 낙인을 받고 정치적 죽음 또는 생물학적 사망에 내몰렸다. 손오공의 장난을 제지하는 삼장법사처럼 마오는 “극좌 행위를 선동하는 검은 마수의 반혁명 세력을 경계하라!” 부르짖었다.

문혁 때도 마오는 “더 빨리!” 모든 일을 해치워야만 한다는 혁명가의 조급증에 시달렸다. 그는 전 인민을 이끌고 정치실험을 이어갔고, 그 실험이 재앙을 불러오자 오류를 덮기 위해 추종자들을 “5.16분자”로 몰아서 숙청했다. 그럼에도 중국 밖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은 아직도 마오의 선의를 맹신하며 그를 “중국의 붉은 별”이라 칭송하고만 있다. <계속>

#송재윤의 슬픈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