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지도자의 안목
1626년 명나라 장수 원숭환이 후금 누르하치의 침략을 격퇴했던 영원성(寧遠城). 원숭환은 이 전투를 계기로 구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중앙포토]
음력 1619년 3월, 명과 조선의 연합군을 물리친 이후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은 거칠 것이 없었다. 곧이어 개원(開原), 철령(鐵嶺), 요양(遼陽), 심양(瀋陽) 등을 잇따라 무너뜨려 요동을 장악하더니 1622년에는 광녕(廣寧)까지 함락시킨다. 후금군은 이제 금주(錦州), 영원(寧遠)은 물론 북경의 관문인 산해관(山海關)까지 응시하고 있었다.
공포에 빠진 명은 산해관을 지키는 데 모든 것을 걸기로 하고 그 바깥의 방어는 사실상 포기한다는 작전을 세운다. 환관 위충현(魏忠賢)이 이끄는 엄당(奄黨·환관당)의 입김이 반영된 국방 대책이었다.
후금 공격 막은 충신 원숭환 처형
“적들과 내통” 간신들 거짓에 속아
후금 군주 홍타이지 계략도 적중
“원숭환과 북경 탈취 밀약” 퍼뜨려
인재 등용 외쳤지만 오판만 거듭
민심 잃으며 결국 농민군에 멸망
1626년 1월, 누르하치가 이끄는 대군이 영원성(遼寧省 興城市)으로 들이닥친다. 누르하치는 자신의 병력이 20만이라며 성을 지키던 원숭환(袁崇煥·1584∼1630)에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원숭환이 거부하자 후금군의 공성(攻城)이 시작됐다. 일찍부터 명군보다 월등히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 기동전을 펼쳐 요동을 석권했던 누르하치의 전술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영원성에서 날아온 포르투갈제 홍이포(紅夷砲) 포탄이 후금군의 얼을 빼놓았다. 격앙된 누르하치는 선봉에 서서 공격을 독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누르하치는 부상으로 쓰러졌고, 후금군은 커다란 인명 손실을 본 채 심양으로 후퇴하고 만다.
산해관 바깥의 고성(孤城)에서 누르하치를 물리치자 천계제(天啓帝)는 고무됐다. 그는 원숭환을 요동 순무(巡撫) 겸 병부 우시랑(右侍郞)으로 승진시켰다. 요동 사령관이자 국방부 차관인 셈이었다.
빼앗긴 요동 수복에 매진한 원숭환
중국 요동에서 북경으로 이어지는 관문인 산해관(山海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현판이 달려있다. [중앙포토]
광동(廣東) 출신의 원숭환은 일찍부터 ‘오랑캐’ 후금에게 빼앗긴 요동을 되찾는 것을 비원(悲願)으로 품었다. 그런 그가 마흔둘 나이에 일약 요동순무가 되면서 비원을 실현할 기회가 다가왔다. 더욱이 1627년 엄당을 비호했던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崇禎帝)가 즉위했다. 요동 수복에 소극적이었던 엄당이 실세(失勢)하면서 원숭환은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었다. 원숭환은 숭정제에게 5년 안에 요동을 수복하겠다고 다짐한다.
숭정제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게 된 원숭환은 1629년 조선의 가도(椵島)에 있던 모문룡(毛文龍)을 소환한다. 모문룡은 ‘요동 수복’을 내세워 명은 물론 조선으로부터 막대한 군자금을 받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싸울 생각은 전혀 없이 외딴 섬에서 밀수 등으로 사복만 챙겼던 그는 위충현을 비롯한 엄당의 고관들에게 뇌물을 바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요동 수복의 걸림돌로 여겨 처형해 버린다.
1626년 누르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칸이 됐다. 홍타이지는 영원성에 바위처럼 버티고 있는 원숭환이 두려워 산해관 방향으로의 공격을 중단한다. 대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힘쓰는 한편, 1627년 조선을 침략했다. 정묘호란이었다.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했던 홍타이지는 1629년 10월, 영원성과 산해관을 우회하여 만리장성 외곽의 희봉구(喜峰口)를 통해 북경으로 침입했다. 원숭환의 허를 찌르고 곧바로 황성(皇城)을 노린 기습작전이었다. 황성 포위 소식에 경악한 원숭환은 수천의 병력을 이끌고 미친 듯이 북경으로 달려온다. 그는 11월 20일, 북경의 광거문(廣渠門) 부근에서 악전고투 끝에 후금군을 격퇴한다.
숭정제
잠시나마 황성이 위기에 처하자 숭정제는 격노했다. 원숭환에게 반감을 품었던 엄당의 잔당들은 황제의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모문룡과 동향(同鄕)으로 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챙겼던 대학사 온체인(溫體仁)은 “원숭환이 홍타이지와 내통하여 후금군을 끌어들였다”며 목을 치라고 촉구했다. 모문룡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호주머니를 허전하게 만든 원숭환에 대한 원한이 엄청난 무고(誣告)로 표출됐던 것이다.
평소 의심이 많고 대국(大局)을 볼 줄 올랐던 숭정제는 결국 홍타이지가 꾸민 반간계(反間計)를 덥석 물고야 만다. 홍타이지는 황성에서 물러나면서 환관 두 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원숭환이 북경을 탈취하기로 후금과 밀약했다”는 이야기를 흘린 뒤 이들을 풀어준다. 부리나케 달려온 환관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숭정제는 ‘결심’을 굳힌다.
“스스로 장성 허물고 멸망 재촉했다”
원숭환
원숭환은 1630년 8월, 북경의 저잣거리에서 책형(磔刑)을 당한다. 기둥에 묶어 놓고 온몸의 살점을 발라내는 잔혹한 처형이었다. 『명사(明史)』의 사관(史官)은 이 대목에서 “숭정제는 스스로 ‘장성’을 허물어 나라의 멸망을 재촉했다”고 적었다. 반면에 홍타이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국의 최고 명장을 제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원숭환이 억울하게 죽은 뒤 명은 급속히 멸망의 길로 치닫는다. 온체인 등은 자신들과 뜻이 다른 신료들을 ‘반역자 원숭환의 동조자’라는 올가미를 씌워 제거했다. 의심만 많을 뿐 사람을 보는 눈이 없었던 숭정제의 묵인 속에 엄당이 조정의 주도권을 되찾으면서 안팎의 위기는 고조됐다. 후금은 힘이 더욱 커져 청(淸)으로 변신했고 명을 자유자재로 공략했다. 전비(戰費)를 마련하기 위해 증세(增稅)를 거듭하면서 농민들은 아우성을 쳤고 민심은 돌아섰다. 곳곳에서 반란이 속출했다.
1644년 3월 16일, 북경 황성의 지척에 있는 창평(昌平)이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게 함락됐다. 다급해진 숭정제는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신료들을 소집했다. 하지만 신료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통곡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이튿날 북경성이 무너지고, 18일에는 내성(內城)마저 위태롭다는 급보가 들어온다. 넋이 나간 숭정제는 수성 책임자인 이국정(李國楨)을 애타게 찾았지만 그와 군사들은 이미 도망친 뒤였다. 숭정제는 아들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나라의 운명이 종말에 이르렀다. 이것은 나의 죄책과 과실 때문이다. 너희들은 목숨을 보전하여 황실의 명맥을 이으라”고 당부했다.
아들들을 황궁 밖으로 내보낸 뒤 숭정제는 황후 주씨(周氏)와 빈궁(嬪宮)들에게 자결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는 두 딸의 처소로 달려간다. 그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평공주(長平公主)와 소인공주(昭仁公主)를 칼로 내려친다. 혹시라도 반란군에게 능욕을 당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황후 주씨가 목매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숭정제는 자신의 명을 어기고 도망치려 했던 후궁 다섯 명을 베어 죽인다.
온몸에 선혈이 낭자한 채 머리를 풀어헤친 숭정제는 환관 왕승은(王承恩)과 단둘이 자금성을 빠져나가 경산(景山)으로 향한다. 그는 가는 도중 황극전(皇極殿) 앞에 매달린 커다란 종을 직접 쳐서 울렸다. 혹시라도 종소리를 듣고 신료들이 달려올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내 시신을 가려다오” 허망한 최후
17세기 초 만주 형세도
이윽고 경산의 꼭대기 수황정(壽皇亭)에 도착한 숭정제는 왕승은을 시켜 유조(遺詔)를 남겼다. "죽어서 열성(列聖)들을 뵈올 면목이 없으니 내 시신의 얼굴을 가려다오.” 숭정제는 이어 수황정 아래 나무에 목을 매 자결한다.
숭정제의 최후는 처절했다. 하지만 그가 망국과 죽음을 앞두고 보였던 비장한 태도를 평소 정치를 할 때 발휘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특히 신료들을 제대로 보는 안목이 있었다면 그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숭정제의 최후를 기록한 『명사』 사관의 평가는 흥미롭다.
"황제는 재위 17년 동안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고심하면서 국사에 힘쓰고 정치에 마음을 다했다. 조정에 나아가 크게 탄식하며 비상한 인재를 얻고 싶다고 했지만 제대로 된 인재를 쓰지 못해 정사는 더욱 망가졌다. 이에 다시 환관들을 신임하여 요직에 배치함으로써 행동과 조치가 마땅함을 잃고 어그러졌다. 복이 다하고 운이 옮겨가 몸이 화변(禍變)에 휘말렸으니 어찌 기수(氣數·시운)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숭정제가 정치를 잘해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고, 훌륭한 인재를 찾겠다고 늘 외쳤지만 결국 환관들을 다시 중용하는 실책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그랬다. 숭정제는 인재 등용을 강조했지만 정작 ‘오랑캐’를 쳐서 요동을 수복하겠다는 책임감과 애국심이 넘쳤던 원숭환을 스스로 제거하는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라와 자신의 운명을 비극으로 몰고 갔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흥망은 제대로 된 지도자의 존재 여부에 달려 있다. 나라 안팎에서 격동의 파고가 더욱 높아질 향후 5년을 이끌 대통령에 대한 선택을 앞둔 오늘, 국민 모두가 사람과 시대를 보는 안목과 능력을 가다듬는 것이 참으로 절실한 시점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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