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신분증, 호패]
1413년 태종 때 '호패법' 실시… 16세 이상 남자 반드시 소지토록 해
백성 조세 징수·군역 동원에 활용
신분 차별 덜한 호패 만들기 위해 숙종 때 종이로 만든 '지패법' 시행도
지난 12월 헌법재판소는 주민등록번호를 바꿀 수 없는 현재 주민등록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어요. 소중한 개인 정보인 주민등록번호가 심심찮게 유출되는 요즘, 주민등록번호를 바꿀 수 없으면 사생활뿐만 아니라 생명·신체·재산에 해를 끼칠 우려가 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2017년 12월 31일까지 관련 법령을 고치도록 해 주민번호를 변경하려면 지켜야 할 절차나 규정을 만든다고 해요. 주민등록번호는 모든 국민에게 주어져 개인을 구별할 수 있는 고유 번호로 주민등록증에 적혀있어요. 주민등록증은 대한민국 국민임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신분증으로 만17세 이상 남녀 개인에게 발급하고 있고요. 그런데 조선 시대에도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신분증인 '호패'가 있었다고 해요. 16세 이상이면 왕실부터 노비까지 모든 신분의 남자에게 필수였던 호패는 어떻게 생겼고, 어떤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었을까요?
▲ /그림=이혁
◇조선 태종 때 호패법을 실시하다
"이 법이 한 번 세워지면 사람들이 모두 한곳에 정착하여 군사를 강하게 하고 나라를 굳건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404년 조선 태종 때 권문의라는 관리가 조정에 올린 글이에요. "이 법이 행해지면 위와 아래가 절도가 있고, 명분을 범하는 일이 없어, 백성이 생업을 편안히 하여 나라에서 내린 명령을 제대로 시행하게 될 것입니다." 역시 태종 때인 1407년 윤목이란 관리가 조정에 보고한 글이지요. 이들이 나라에 건의한 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호패법'이었어요. 바로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신분증인 호패를 백성에게 지급하여 차고 다니게 하면 사람들을 정착시켜 생업에 몰두하게 할 수 있고, 군사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거죠. 1413년 태종은 호패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했어요.
◇호패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갈까?
당시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에서는 호패의 모양·재질·들어가야 하는 내용과 호패 제도 시행에 관한 것들을 논의했다고 해요. 고민 끝에 호패의 모양은 위는 둥글고 아래는 각진 네모이며 길이가 약 10㎝·폭 4㎝·두께 0.6㎝ 정도로 정해졌지요. 특히 신분에 따라 호패의 재질을 다르게 해 차별을 두었답니다. 2품 이상 관리는 상아(코끼리의 위턱에 길게 자란 이빨)나 사슴뿔로 만들었고, 4품 이상은 사슴뿔이나 황양목이란 나무로, 5품 이하는 황양목·자작목, 7품 이하는 자작목만, 평민 이하는 잡목을 사용했어요.
▲ 거주지의 통과 호까지 적힌 서울 경기 지역 한량들의 호패. /국립중앙박물관
호패에 들어가는 글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2품 이상은 관직과 성명을 기록했고, 3품 이하 관리들과 공이 큰 관리의 아들은 관직·성명·거주지를 기록했어요. 일반 백성의 호패에는 이름·거주지·얼굴빛·수염이 있는지 없는지가 세세하게 기록되었다고 해요. 5품 이하 군인은 소속 부대와 키를 써 놓았고 노비의 경우에는 나이·거주지·얼굴빛·키·수염 외에 주인이 누군지도 적혔고요. 또한 호패를 받지 않는 자, 남에게 빌리거나 빌려주는 자, 위조하는 자, 호패를 잃어버리는 자는 엄하게 처벌받게 하였지요.
◇평범한 백성이 호패 차는 것 꺼렸던 이유
물론 호패와 같은 신분증이 조선 태종 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에요. 고려 말 중국 원나라의 제도를 따라 군역의 의무를 지는 자에게 신분 증명서를 몸에 차게 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조선 태종 때 호패법을 실시한 거예요.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호패법이 지속적으로 잘 지켜졌을까요? 사실 호패법은 여러 차례 폐지되고 다시 시행되기를 반복했어요. 태종 이후에는 세종·광해군·인조·숙종 때 부활했었지요.
그 이유는 백성이 호패를 차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에요. 호패는 사실 16세 이상 남자들을 군적(군인으로서의 소속·신분을 밝힌 문서)에 올려 군역에 동원하기 위한 제도예요. 호패를 찬 백성은 국가를 위해 힘든 노동을 하는 부역을 져야만 했어요. 그래서 평민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호패를 위조하기도 했지요.
◇종이 호패도 한때 존재했다는데
호패를 위조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숙종 때 윤휴라는 인물은 호패법을 과감하게 개혁하자고 주장했어요. 종이로 된 호패를 사용하는 지패법(紙牌法)을 시행하자는 것이었지요. 왜 하필 종이였을까요? 당시 겉에 차고 있는 호패가 상아·사슴뿔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흔한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보면 신분을 바로 알 수 있었어요. 일부는 남들에게 보이는 호패에 따라 체면을 신경 쓰기도 했겠지요. 윤휴는 신분에 상관없이 종이 호패를 들고 다니다가 포졸의 검사가 있을 때만 보여주면 양반이건 평민이건 힘과 뜻을 모아 나라의 경제를 살리거나 외적을 물리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재질만 바꾸자는 게 아니라 윤휴는 세금을 내지 않던 양반들에게도 군포(군역을 지지 않는 대신 내는 세금)를 거둬야 한다는 '호포법'을 주장하기도 했어요. 양반의 인구를 정확히 계산해 세금을 부과하여 나라의 경제를 살리자는 주장이었지요. 일반 백성인 평민들은 그의 주장에 환호했지만, 양반들은 '양반과 상민은 그 신분이 엄연히 다른데 이를 무시하는 것'이라며 반대했지요. 그래서 지패법은 2년 정도 실시되다가 폐지되고 말아요. 그 후 영조 때 양인의 군포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이 시행되었고, 대원군 때 비로소 신분 구별 없는 호포법이 시행되었답니다.
[당시 세계는?]
조선에서 호패법을 첫 시행했던 15세기, 중세 서유럽에서는 봉건시대의 대표적인 사회제도인 장원(莊園·영주가 가진 토지에서 농노들이 자급자족을 하고 노동력과 세금을 바치는 제도)이 몰락하고 있었어요. 14~15세기 유럽에서는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가 통용됐고, 장원 제도가 해체된 후에는 중세 도시가 발달하게 된답니다.
기획·구성=김지연 기자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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