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허름했던 대원군 집, 궁궐같은 사저로 변했어요

bindol 2021. 11. 7. 05:02

[운현궁]

세도 정치에 억눌렸던 왕족 이하응
양자로 보낸 둘째 아들이 왕 되자 흥선대원군 된 후 조정 실권 장악

허름했던 운현궁, 양반 드나들고 권력 커질수록 궁궐처럼 변해
10년 뒤 권세 잃자 쇠락했어요

헌재 판결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가면서 최근 이 일대가 시끌벅적하다고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경찰들, 이를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죠.

파면 전에는 박 전 대통령의 자택을 사저(私邸)라고 불렀어요. 사저는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이나 고위 관료가 사는 개인 주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 인근(지금의 안국역 일대)에 있던 한 사저에 많은 사람이 몰려든 일이 있었어요. 대체 누구의 사저였길래 시끌벅적한 풍경이 펼쳐진 걸까요?

◇관상감 근처에 있던 허름한 왕족의 집

1863년, 조선시대에 날씨와 천문을 살피던 관청인 관상감 근처에는 허름한 집 한 채가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선물을 든 하인을 대동한 양반들이 부지런히 이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답니다.

 /그림=정서용

"요즘 저 집에 왜 양반들이 저렇게 많이 드나들지? 얼마 전만 해도 개미 새끼 하나 볼 수 없을 만큼 썰렁했는데."

"집주인이 왕족인 이하응 대감 아닌가. 글쎄 이하응 대감의 둘째 아들이 곧 임금님이 될 거라 하더라고."

"그래? 그럼 저 집이 대원군의 사저가 되는 건가?"

허름한 집의 주인인 이하응은 영조의 후손인 남연군의 넷째 아들입니다. 조선 왕족 출신이었지만 이하응은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안동 김씨 등 세도 가문들이 왕족들을 통제하거나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죠.

탕평책을 이어가던 정조가 죽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의 정치는 크게 혼란스러워졌어요. 특정 가문이 세도 정치로 부정부패를 일삼고 횡포를 부렸기 때문이죠. 민생도 어려워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지만, 세도가의 막강한 권세에 대항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하응 역시 세도 정치를 보며 분노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인내의 세월을 허름한 집에서 보내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기회가 마침내 찾아왔어요. 이하응은 둘째 아들 명복을 당시 궁궐의 최고 어른이던 신정왕후 조씨의 양아들로 보내었는데, 철종이 후사 없이 숨을 거두면서 명복이 왕위를 잇게 된 것이죠. 이 소문이 무성해지자 양반들도 왕의 아버지가 될 이하응을 찾아오기 시작한 거예요.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

소문대로 명복은 26대 임금 고종으로 즉위하였고,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이 되었습니다. 열한 살에 불과했던 어린 고종을 대신해 흥선대원군은 순식간에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세도 정치를 없애기 위한 강력한 철권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어요. 하루아침에 조선 최고의 권력자로 변신한 것이죠.

허름했던 이하응의 집도 '운현궁(雲峴宮)'이라는 이름의 사저가 되었습니다. 운현궁이라는 이름은 흥선대원군의 집과 관상감 사이에 있는 고개 이름 '운현'에서 따온 거예요. 운현이란 '서운관현'의 줄임말로, '서운관(관상감의 옛 이름)이 있는 고개'라는 뜻입니다.

흥선대원군의 위세가 높아지면서 운현궁은 이름처럼 마치 궁궐 같은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담장 둘레가 수 ㎞에 이를 만큼 넓어졌고, 대문도 4개나 설치되었어요. 흥선대원군이 고종이 머물던 창덕궁과 왕래하기 편하도록 운현궁과 창덕궁을 잇는 전용 문이 만들어지기도 했답니다.

고종이 왕이 된 지 3년이 되던 1866년에는 고종과 민씨(명성황후)의 결혼식이 운현궁에서 열렸어요. 이때 운현궁에 1600여 명의 수행원과 700필의 말이 동원되었다고 하니 운현궁의 규모와 흥선대원군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권력은 10년을 넘기지 못한다

민씨는 흥선대원군이 세도정치의 폐단을 막기 위해 직접 고른 며느리였어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정치적 기반이 없는 민씨를 아들 고종과 결혼하도록 해 외척이 정치판에 끼어드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죠.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고종과 궁녀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명성황후 민씨는 고종을 부추겨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대립하도록 했어요. 명성황후를 지지하고 흥선대원군에 반대하는 세력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고종도 결국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1873년 11월, 창덕궁과 운현궁을 잇는 문이 폐쇄되었고, 권세를 잃은 흥선대원군은 결국 하야(下野·관직이나 정계에서 물러남)하였어요. 이후 궁궐 같던 운현궁도 점점 쇠락의 길을 걸었고요.

이를 본 당시 사람들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을 자주 하였대요. 권불십년이란 '아무리 위세가 대단한 권력도 10년을 넘어 이어가긴 어렵다'는 뜻입니다.

[명성황후가 자란 '감고당']

당시 운현궁에서 수백m 떨어진 거리에는 감고당(感古堂)이라는 집이 있었어요. 19대 임금 숙종이 지은 감고당은 대대로 여흥 민씨 사람들이 살았는데, 민씨도 왕비가 되기 전까지 이 집에서 살았지요. 이후 감고당은 왕비의 친정집으로 위세가 높았지만,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운현궁처럼 점점 쇠락했습니다.

감고당 건물은 1966년 서울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다가 2006년에는 다시 해체되어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는 여주로 이전·복원되었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