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국가 위기에 맞설 새로운 인재 꿈꾼 윤씨 가문 학당

bindol 2021. 11. 7. 05:03

[종학당(宗學堂)]

조선 중기 외적 침입·정치 분쟁에 윤순거 형제, 문중 학당 열고
위기 극복 위한 새로운 교육 시도
'백의정승' 윤증이 학당 이끌며 인성·예법·재테크 요령도 가르쳐
270년간 과거 합격자 42명 배출

최근 사회 곳곳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교육도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요. 인공지능과 로봇이 여러 직업을 대체할 거라는 예상에 맞춰 더 창의적이고 여러 분야의 지식을 융합·활용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죠. 이에 지식 암기나 주입식 교육이 아닌 체험과 토론을 중심으로 한 자기 주도 학습으로 교육이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한 나라의 교육은 늘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달라졌어요. 물론 우리 역사 속에서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교육을 시도한 일들이 있었지요.

◇종가의 형제, 교육을 논하다

조선 인조 때 파평 윤씨 종가(宗家·족보로 보아 한 문중에서 맏이가 이어 온 큰집)에는 윤순거라는 뛰어난 학자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벼슬길을 거부하고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만 열중하였습니다. 윤순거의 아버지 윤황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반대하다 유배를 갔고, 작은아버지 윤전은 강화도에서 청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었어요. 이런 상황에도 정치적 분쟁에만 골몰하는 조정 상황에 윤순거는 염증을 느낀 것이죠.

그러던 어느 날, 윤순거는 동생 윤원거, 윤선거와 함께 당시 시대 상황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형님, 외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는데 조정에 신하들은 정치적 분쟁만 일삼는 붕당(朋黨) 정치를 계속하니 나라의 미래가 크게 걱정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교육을 통해 바른 인재를 키워야 하지 않을까요?"

"나도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네. 그래서 말인데 우리 문중의 아이들이라도 직접 가르쳐 훌륭한 인재로 키워낼 학당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데."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도 뜻과 마음을 다해 문중 아이들 교육에 힘쓰겠습니다."

이에 1643년 윤순거 형제는 기물과 책, 재산을 마련하여 지금의 충남 논산에 파평 윤씨 아이들을 위한 종학당(宗學堂)을 열었어요. 조선시대에 종학(宗學)이라 하여 왕족의 자녀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있었지만, 이렇게 문중의 자제를 위해 문중에서 직접 서당을 열었던 일은 드물었답니다.

◇완전히 이해하고 외우도록 하다

종학당의 초대 학장이 된 윤순거는 동생들과 함께 엄격한 학칙과 원칙에 따라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윤씨 문중의 자제들은 열 살이 넘으면 종학당을 입학해 매일 과제를 하며 열심히 공부해야 했습니다. 학생들은 모두 합숙을 했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시험을 봐야 했기 때문에 공부에 소홀할 틈이 없었지요.

 그림=정서용

특히 종학당에서는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익히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신 한권의 책을 의문이 남지 않을 때까지 완전히 이해하고 외우고 난 뒤에야 다른 책을 공부하도록 하였어요. 암기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만큼 모르는 내용을 철저히 이해하는 깊이 있는 공부를 강조한 것이죠.

인성 교육에도 신경을 기울였어요. 바른 행실과 가정을 다스리는 일, 문중 모임의 예법을 토의하는 시간을 통해 자연스레 예법을 깊이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재화를 유리하게 운용하는 일'도 가르쳐 어릴 때부터 경제관념을 갖고 재산을 잘 관리하는 법도 알려주었고요.

◇42명이 급제한 이름난 학당으로

종학당은 윤순거와 동생 윤선거, 윤선거의 아들 윤증(1629~1714)이 차례로 학장을 맡으며 점점 이름난 학당으로 발전하였어요. 특히 윤증은 당시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송시열의 제자로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을 익히며 종학당을 통해 후진을 양성하는 데 일생을 보냈습니다. 이에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윤증을 '백의정승(白衣政丞·흰 옷을 입은 고위 관료)', 즉 관복을 입지 않은 정승이라고 불렀어요. 윤증 이후에도 종학당은 꾸준히 발전하여 1910년 일제의 국권 침탈로 학당이 폐쇄되기 전까지 42명의 과거시험 급제자를 배출했습니다.

하지만 종학당이 당쟁과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교육기관으로 발전하지 못한 건 아쉬운 점이에요. 그럼에도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교육을 시도해 뛰어난 인재를 배출했던 노력은 값진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 송시열과 윤증이 다툰 '회니시비'

송시열과 윤증은 조선 시대 당쟁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는 '회니시비(懷尼是非)'를 계기로 스승과 제자에서 정치적 라이벌 관계로 돌아섰어요. 회니시비란 '송시열의 근거지인 회덕(懷德)과 윤증의 근거지 이산(尼山) 사이에 벌어진 갈등'이라는 뜻입니다.

1669년 윤선거가 죽자 윤증은 아버지의 묘갈명(죽은 사람의 행적과 인적 사항을 묘비에 새기는 글)을 스승인 송시열에게 적어달라고 부탁하였어요. 그런데 송시열은 윤선거를 비판하는 묘갈명을 보냈고, 윤증이 이를 고쳐달라고 하자 거부했습니다. 이 일로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나빠졌어요.

두 사람의 갈등은 남인이 대거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경신환국(庚申換局)이 벌어지면서 당파 싸움으로 커졌습니다. 남인을 엄하게 처벌하자고 요구한 노론은 송시열이 이끌었고, 이보다 관대한 처벌을 주장한 윤증은 소론의 대표로 노론에 맞섰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