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우산국 정벌한 이사부, 신라의 삼국통일 초석 놓았죠

bindol 2021. 11. 8. 04:39

[이사부와 삼국통일]

내물왕 후손인 20대 청년 이사부, 뛰어난 전략으로 우산국 점령했죠
백제·고구려 전쟁 틈타 한강 차지… 금관가야 점령해 통일 바탕 마련

최근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 해양과학조사선 '이사부함'의 이름을 문제 삼아 양국 과학자들의 공동 연구를 막았다는 보도가 나왔어요. 우리나라 해양 과학자들이 일본 과학자들에게 이사부함에서 함께 해양연구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일본 해양연구개발기구(JAMSTEC)가 일본 정부 지시에 따라 자국 과학자들에게 공동 연구에 참여하지 말도록 통보했다는 거예요.

'이사부함'은 지난해 11월 첫 취항을 한 과학조사선으로, 이사부는 512년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우산국을 신라 영토로 편입시킨 장수(將帥·군사들의 우두머리)예요. 독도가 줄곧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해온 일본 정부에게 그만큼 이사부가 불편한 이름이라는 얘기죠.

◇강원도 삼척의 군사 책임자로

우리는 이사부라고 하면 독도만 떠올리지만 사실 이사부는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인공이 되는 데 중요한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에요. 이사부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신라의 영웅으로서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죠.

 /그림=정서용

"이사부를 실직주(悉直州)의 군주로 임명하노라!" 505년, 신라의 지증왕이 실직주의 군주로 이사부를 임명했어요. 지증왕은 신라의 제22대 왕으로, 제21대 임금인 소지 마립간(소지왕)이 아들 없이 죽자 왕족으로서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어요. 지증왕이 왕위에 오를 때 나이는 무려 64세였죠.

지증왕은 나라의 발전과 왕권 강화를 위해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어요. 나라 이름을 '사로'에서 '신라'로 바꿨고, '마립간(麻立干)'이라고 부르던 임금의 호칭도 처음으로 '왕(王)'으로 바꾸었죠. 또 지방을 주·군·현(州郡縣)으로 나누고 그곳에 관리를 파견해 자신의 명령이 지방 곳곳에 전달되게 하였답니다.

그중 지증왕이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 곳이 바로 동해 지역이었어요. 동해를 확실하게 장악해야 이를 발판으로 한반도 내륙으로 세력을 뻗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증왕은 동해 지역 중심부에 실직주(오늘날 강원도 삼척)를 설치하고 그곳 군주로 신라 제17대 내물왕의 후손이던 이사부를 임명했어요. 군주는 그 지역의 군사 책임자인 동시에 지역 행정을 맡아 처리하는 관리였는데, 당시 이사부는 20대 젊은 청년이었죠.

이사부가 그토록 젊은 나이에 중요 관직에 임명된 건 왕실과 가까운 핏줄인 '진골(眞骨·왕족이나 왕이 될 자격은 없는 신분) 귀족'이란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장수로서 군사적인 능력과 지혜가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랍니다. 능력을 인정받은 이사부는 512년 아슬라주(지금의 강원도 강릉) 군주 자리에 오른 뒤 드디어 우산국(于山國) 정벌에 나서요. 우산국은 지금의 울릉도와 그 부속 섬을 다스리던 고대 국가였죠.

'삼국사기'는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요. "우산국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 힘으로 굴복시키기 어려워, 이사부가 꾀를 내어 나무로 커다랗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사자를 조각해 배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 사람들을 겁주며 항복을 받아냈다"는 것이죠. 이에 대해 사실은 이사부가 동해 지역에서 오랫동안 훈련·양성한 대규모 수군(水軍)이 험난한 뱃길을 헤쳐오는 위협적인 모습을 보고 겁을 먹었기 때문일 거라는 해석이 많아요. 실제 이사부가 우산국을 신라에 복속시키고 동해를 지배하게 되자 그 동안 수십 차례 신라를 공격해오던 왜적의 출몰도 사라졌다고 해요.

◇한반도로 세력을 뻗치다

이사부는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신라 23대 왕) 때 금관가야를 항복시키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어요. '일본서기'라는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 책에 따르면 529년 이사부가 3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늘날의 부산 다대포 지역으로 추정되는 '다다라'라는 곳에서 세 달 동안 머물렀어요. 기회를 엿보던 이사부는 금관가야 등 4개 지역을 점령하고 그곳의 백성을 모두 데리고 신라로 돌아왔다고 해요. 그 뒤 금관가야는 완전히 힘을 잃고 532년 신라에 복속되고 말았죠.

이사부는 진흥왕(신라 24대 왕) 2년인 541년 오늘날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부령(兵部令)에 임명됐고, 그 후 20여 년간 병부령을 지내면서 신라가 한반도 전역에 세력을 넓히는 데 큰 공을 세워요. 550년엔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백제가 서로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고구려의 도살성(오늘날 청북 청주 지역)과 백제의 금현성(오늘날 충북 진천 지역)을 점령하고 한강 유역을 신라 차지로 만들었죠. 562년에는 화랑 '사다함'과 함께 대가야를 공격·멸망시켜 신라가 낙동강 하류 지역을 완전히 손에 넣도록 만들었죠. 이처럼 신라가 한반도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는 역사의 중심에는 이사부가 있었고, 이사부의 활약을 바탕으로 신라는 훗날 삼국통일을 이뤄낸 거예요.


[이사부의 성(姓)은 김씨?]

'삼국사기'는 이사부(異斯夫)의 성은 김씨이며, 내물왕 4대손으로 '태종'이라 불렸다고 써있어요. 반면 '삼국유사'는 이사부의 성이 박씨이며 이름을 이종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그가 내물왕의 후손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김씨가 맞을 것으로 추정돼요.

또 '삼국사기'에는 이사부가 진흥왕 때 경주 흥륜사를 지어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국사 편찬을 제안해 거칠부(신라 중기의 재상)에게 역사를 기록하게 했다고 쓰여 있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