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제와 경연]
조선 태종, 관원 평가하는 제도 시행… 정약용 "더 엄격히 심사해야" 주장
신하가 왕에게 유교 가르치던 '경연', 나랏일에 대한 토론·비판 이뤄졌죠
국회에서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한 국정감사(國政監査)가 한창이에요. 국정감사란 국회가 국민을 대신해 정부가 국정(나랏일)을 제대로 운영하고 있는지 감시·견제하고 비판하는 것이랍니다. 국정을 둘러싸고 다양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토론을 진행하고, 이 과정은 국민들이 지켜볼 수 있도록 생방송으로 중계되지요. 그렇다면 조선시대를 비롯해 왕이 압도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과거에도 국정감사와 비슷한 제도가 있었을까요?
◇조선에도 근무평가제도가?
정부가 나랏일을 똑바로 하고 있는지 국회가 감시하고 비판하는 국정감사 제도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랍니다. 왕이 최고 통치자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시대에는 있을 수 없던 제도이지요. 그렇다면 당시 신하들은 왕이나 관리들이 나랏일을 잘못 처리할 때도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을까요?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은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라는 책에서 '고적제(考績制)'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답니다. "고적법을 엄하게 하고 고적의 조목(항목)을 상세하게 해서 요순시대의 태평한 옛 모습을 복원하도록 해야 합니다!"
고적제는 왕이 임명한 관리들이 얼마나 제대로 나랏일을 하는지 평가하고 감시하는 제도로, 오늘날 국정감사와 기능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태평성대의 전설로 전해지는 중국 요순시대에 요 임금과 순 임금이 관리들에게 '반드시 임금 앞에 나서 스스로 행한 공적이나 과오에 대해 말하도록 하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지요.
▲ 그림=정서용
사실 고적제는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 때부터 시행돼왔어요. 중앙행정관청의 경우 당상관(정3품 이상 고급관리)이나 육조(6개 중앙관청)가, 지방관청의 경우 관찰사(각 도에 파견된 지방행정 최고 책임자)가 매년 6월과 12월 정기적으로 관원들을 평가했죠. 이를 문관(文官)은 이조(조선시대 인사행정기관), 무관(武官)은 병조(조선시대 국방부)에 보고해 다음 인사에 반영했다고 해요. 하지만 조선 후기 당파 간 싸움이 격렬해지고 세도정치(극소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형태)로 나라 기강이 흔들리면서 부정부패가 곳곳에 퍼졌고, 고적제에도 사사로운 청탁이나 압력이 들어가 여러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요.
그러자 정약용이 고적제를 보다 치밀하게 운영하자고 제안한 거예요. 정약용은 관리들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방법 등을 12강6목 (72강목)으로 완성했어요. 우수 등급을 받은 관리는 반드시 승진시키고, 최하위 등급을 받은 관리는 반드시 해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답니다.
◇임금에 대한 견제, '경연'
임금과 신하들이 질문과 토론을 통해 나랏일을 논의하는 제도도 오늘날 국정감사와 비슷한 역할을 했어요. 바로 경연(經筵)이에요.
경연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하들이 임금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제도였는데, 이때 나랏일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어요.
선조 14년인 1581년 5월, 임금이 경연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물었어요. 당시 백성들은 몇 년째 이어진 흉년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지요.
"기근이 계속되는데 병난(전쟁으로 인한 재난)마저 일어난다면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는가?" (선조)
"나라의 형세가 위급하니 임금께서도 마땅히 대책을 생각하셔야 하고 모든 경비를 줄여야 할 것입니다." (대사헌 이이)
"쓰임새는 별로 늘린 것 없이 단지 옛 규례만 따르는데도 오히려 부족하니 어찌해야 하나?" (선조)
"해마다 흉년이 들고 있는데 경비는 그대로 쓰고 있으니 어찌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현재 각 지방에서 중앙에 공물을 바치는 원칙이 공평하지 못하니, 사정을 고려해서 공물을 바치도록 하면 백성들 고통이 풀어질 것입니다." (이이)
그런데 수개월이 지나도 선조가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자 이이가 이렇게 따집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경연에서의 토론이) 한낱 관례적인 형식에 그칠 뿐이니 어떻게 하늘의 재앙에 대응하겠습니까?"
상소(上疏)라는 제도도 있었는데 처음에는 사헌부·사간원 관리들이 임금에게 옳지 못한 일을 고치라고 글을 올리는 것이었어요. 그러다 점차 여러 기관의 전·현직 관리들과 지방의 유생들까지도 나라 정책에 대한 의견을 글로 올릴 수 있었지요. 일반 백성들도 상소를 올릴 수는 있었지만, 글을 알아야 하는데다 형식이 복잡하고 검열도 엄격해 사실상 자신의 뜻을 임금에게 전하기는 어려웠답니다.
☞ 신문고와 격쟁
조선 태종은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직접 해결해주겠다며 대궐 밖에 신문고(申聞鼓)라는 북을 설치했어요. 누명을 썼다거나 억울한 사연을 가진 백성들이 직접 신문고를 울리도록 했는데, 나중에는 이용에 여러 조건을 두면서 효용이 크게 떨어졌어요. 신문고는 연산군 때 결국 폐지되고 말아요.
신문고가 폐지되자 백성들은 임금이 행차하는 길가에 서서 시끄럽게 징이나 꽹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했어요. 이를 격쟁(擊錚)이라고 한답니다.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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