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과 귀주대첩]
올해 귀주대첩 998주년 행사 열려… 거란이 세 차례에 걸쳐 고려 침략
강감찬, 3차 침입 무찔러 나라 구해 을지문덕·이순신과 함께 '3대 명장'
고려시대 '구국(救國·나라를 구함)의 영웅'으로 불리는 강감찬(948~1031) 장군이 거란의 10만 대군을 무찌른 '귀주대첩'이 올해로 998주년을 맞았습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집터가 있는 낙성대(落星垈·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 공원을 중심으로 '강감찬 축제'가 열렸지요. 오늘은 강감찬 장군과 귀주대첩에 대해 알아봐요.
◇고려, 거란의 침입을 받다
900년대 동북아시아는 혼란의 소용돌이였어요.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는 북진(北進)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중국에선 당나라 멸망 이후 크고 작은 나라가 중원(中原·중국 중심부)을 통치하는 '5대 10국 시대'가 열렸지요. 중국 북부·몽골 지방에선 유목 생활(특정한 거주지 없이 이동하면서 소·양 등을 기르는 것)을 하던 거란족이 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차지할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답니다.
고려에게는 거란이 북진 정책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어요.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켰지요. 이러니 처음부터 고려와 거란 사이는 좋지 않았어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거란이 보낸 사신 30명을 섬으로 쫓아내고 낙타 50필을 굶겨 죽이는 등 거란에 적대적인 정책을 펼쳤답니다. 죽기 전엔 "거란 같은 야만족 풍습은 멀리하라"는 유언(훈요 10조 중 하나)까지 남겼을 정도였어요. 그 뒤를 이은 고려 왕들도 거란을 배척했어요.
960년 송나라가 중원을 통일하자 고려는 송나라와 가깝게 지내는 외교 정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송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을 지배하고 싶어 하던 거란은 고려를 먼저 정벌해 고려가 자기들에게 복종하도록 만들고 싶어 했죠. 993년 10월, 거란의 왕 성종이 장수 소손녕과 80만 대군을 보내 고려를 공격했는데 이것이 거란의 1차 침입입니다.
▲ 그림=정서용
소손녕이 이끄는 80만 대군은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 청천강 위쪽까지 쳐들어왔어요. 소손녕은 고려 조정에 편지를 보내 항복하라고 했지요. "80만 군사가 도착했다.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너희를 모조리 무찔러 멸망시킬 테니, 왕과 신하가 우리 군영(군대가 주둔하는 곳) 앞으로 오라!"
이때 고려의 유능한 외교관 서희가 소손녕을 만나 담판을 벌입니다. 서희는 '거란을 섬기라'는 소손녕의 요구에 답합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다. 사실 압록강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족이 점령하고 있어 거란과 왕래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그러니 거란과 교류하지 못하는 것은 전부 여진 탓이다. 만일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가 그 땅을 회복해 성(城)을 쌓으면 국교(나라 간 외교 관계)가 통할 것이다."
이 담판 이후 고려는 압록강 동쪽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 6주(압록강 하류의 여섯 행정구역)를 차지해 영토를 압록강까지 넓힐 수 있었답니다.
◇소가죽으로 물길을 막다
그러나 서희의 담판 이후에도 고려는 송나라와 우호적 외교 관계를 끊지 않았어요. 그러자 거란은 고려를 다시 침략할 기회를 엿봅니다. 거란은 고려의 장군 강조가 목종을 내쫓고 현종을 왕으로 세우는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혼내주겠다는 핑계를 대고 1010년 고려를 다시 공격합니다. 거란의 2차 침입이지요.
고려의 수도인 개경(현재 개성)이 함락 위기를 맞자 현종은 거란에 항복하려 했답니다. 그런데 정4품 낮은 벼슬자리에 있던 강감찬이 이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일단 적의 거센 공격을 피한 뒤 끝까지 버텨 싸워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하십시오!"
전쟁이 예상 밖으로 길어지자 거란 왕은 보급로가 중간에 끊길 것을 걱정해 결국 고려와 화해 조약을 맺었답니다. 이때 양규 장군이 이끄는 고려 군대가 철수하는 거란 군대를 기습 공격해 일곱 차례나 승리를 거두는 성과를 올렸지요.
거란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고려 왕은 예를 올려라' '강동 6주를 바쳐라' 같은 요구를 했어요. 하지만 고려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1018년 또다시 고려를 침공합니다. 거란의 3차 침입이에요.
장수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거란군이 쳐들어오자 현종은 강감찬에게 20만 군사를 주고 막으라고 했어요. 거란의 침입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오던 강감찬은 평북 흥화진으로 나아가 정예 기병 1만2000여 명을 산골짜기에 몰래 숨겼답니다. 강감찬은 소가죽을 꿰어 만든 커다란 줄로 흥화진 동쪽 냇가의 물줄기를 막은 뒤 거란군이 골짜기를 건너가기를 기다렸고, 거란군이 지나자 한꺼번에 물을 터뜨렸어요. 혼비백산하는 거란군을 숨어있던 정예군이 공격하면서 강감찬은 큰 승리를 거뒀지요.
엄청난 피해를 본 소배압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개경에 쳐들어가지만, 함락에는 실패합니다. 거란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강감찬이 압록강 근처 귀주 지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크게 무찔렀어요. 소배압은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건너 겨우 목숨만 건졌답니다.
이처럼 강감찬이 탁월한 전략으로 거란을 물리친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부른답니다.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강감찬은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명장으로 이름을 남겼답니다. 이후 고려는 거란과 여진의 침략을 막고자 흥화진 북쪽부터 동해안 도련포에 이르는 1000여 리에 돌로 만든 성벽인 '천리장성(고려장성·북한 국보 48호)'을 쌓았답니다.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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