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의천 "쌀·옷감 대신 화폐로 거래하자"… 王에 건의했죠

bindol 2021. 11. 8. 04:56

[화폐 유통]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
송나라 화폐 제도 보고 도입 건의… 해동통보 등 주화 유통 이끌었죠
조선시대 김육도 상평통보 제안해

요즘 비트코인 등 가상 화폐에 대한 논란이 뜨거워요. 가상 화폐가 현실에서 충분히 화폐 기능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측과, 실체가 없는 투기 상품으로 사회적 혼란만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측이 대립하고 있답니다.

가상 화폐 논란으로 화폐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는 사람도 많아요.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화폐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유통에 힘쓴 인물은 누가 있을까요?

◇승려가 된 왕자

1065년 어느 날, 고려의 11대 왕 문종이 아들들을 불러놓고 말했어요. "누가 출가(出家)해서 나라와 왕실을 위해 복을 쌓겠느냐?"

출가란 일반 사회를 떠나 절에 들어가 불교 수행에 힘쓰며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승려가 되는 것을 말해요. 문종은 불교를 믿고 따르던 독실한 신자였을 뿐 아니라 유학(유교)을 장려해서 학문과 문화를 크게 발전시킨 왕이었어요.

 /그림=정서용

"폐하, 제가 출가에 뜻을 두고 있습니다. 그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물음에 이제 겨우 열한 살 된 넷째 아들 왕후가 나서 대답했어요. 왕후는 그 길로 궁궐에서 나와 절에서 불교를 공부하며 승려가 되었답니다. 그가 훗날 '대각국사'라고 불린 승려 '의천'이에요.

의천은 불교 경전 연구를 위해 송나라에 유학을 다녀왔고, 흥왕사(경기도 덕적산에 있었던 큰 절) 주지 스님이 되어 제자들을 키우고 대장경 해석서를 편찬했답니다. 교리 연구를 중요하게 여기는 교종(敎宗)과 수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종(禪宗)이라는 두 교파를 합친 '천태종'이라는 불교 교파를 확립하기도 했지요.

의천은 송나라 유학 당시 화폐 경제가 얼마나 편리하고 효율적인지를 경험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귀국 후 화폐를 사용하자고 적극적으로 건의했지요. 사실 고려는 이미 6대 임금 성종 때(996년)에 '건원중보(乾元重寶)'라는 철전(鐵錢·철로 만든 동전)을 만들어 이듬해 발행했지만 제대로 유통되지는 못했어요.

◇화폐 사용을 건의하다

의천은 15대 임금 숙종 때 화폐를 사용하자고 건의했어요. 숙종은 문종의 셋째 아들이자 의천의 형이었지요. 의천은 쌀과 옷감 대신 화폐를 사용하면 운반하기도 편하고, 화폐는 쌀이나 옷감과 달리 하급 관리인 아전들이 그 수량을 속일 수 없다는 장점이 있다고 주장했어요. 쌀이나 옷감 같은 현물을 거래하면서 일부 관리가 곡식에 다른 것을 섞거나 불량한 옷감을 주고받는 등 폐단이 만연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또 의천은 나라에서 관리들에게 쌀로 봉급을 주는 대신 화폐로 지급하면, 관리들이 농사짓는 백성을 독촉하고 괴롭히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설득했어요. 또 쌀을 비축할 수 있어 흉년에 효과적으로 대비할 수도 있다며 적극적으로 화폐를 사용하자고 주장했지요. 당시 일부 귀족은 흉년에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아주 높은 이자를 챙기는 못된 짓을 하고 있었거든요. 즉 의천은 화폐 경제를 통해 귀족이 경제를 장악하는 현실을 고쳐서 국가가 주도하는 정치·경제 제도를 만들자고 개혁안을 내놓은 것이에요.

숙종은 이러한 의천의 의견을 받아들여 1097년 주전관(화폐를 만드는 관원)과 주전도감(화폐를 만드는 관청)을 설치하고, 1102년부터 해동통보·삼한통보·삼한중보 등 여러 동전을 만들어 유통시켰답니다. 이것이 우리 역사에서 본격적인 주화(금속 화폐) 유통의 시작이에요.

◇화폐 유통을 위해 힘쓴 김육

조선시대에도 화폐 유통을 위해 힘쓴 인물이 있었어요.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인 김육(1580~1658)이랍니다. 김육은 각 지방에서 생산하는 토산물을 세금으로 바치게 한 '공납' 제도를 백성 각자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에 비례해 쌀로 내게 하는 '대동법(大同法)'으로 바꾸는 데 평생을 바쳤어요.

김육은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나라 경제가 발전하도록 하기 위해 화폐 유통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요. 네 차례나 중국을 오가면서 그는 경제 발전의 중심엔 화폐가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16대 임금 인조 때인 1646년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 화폐를 만들어 먼저 사용해보자는 의견을 올렸지요. 또 17대 효종 때에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중국의 동전을 사가지고 와 평양 등에서 유통시켜 보기도 했고, 이미 인조 때 한 번 발행했다가 결과가 나빠 중단했던 '상평통보'를 다시 만들어보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어요. 그의 이런 의견이 받아들여져 서울과 서북 지방에는 상평통보 일부가 사용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김육이 주도한 화폐 유통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화폐의 가치를 농민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금속 화폐를 계속 만들 수 있는 재료도 부족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이런 김육의 노력이 바탕이 돼 마침내 숙종(19대 임금) 때인 1678년 영의정 허적과 좌의정 권대운 등의 주장에 따라 다시 상평통보가 만들어졌고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조선 말기 현대식 화폐가 나오기 전까지 조선시대 유일한 법정(법으로 정식 인정한) 통화 구실을 했지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