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세종, 향악과 중국 음악 조화시켜 제례악 체계화했어요

bindol 2021. 11. 8. 04:57

[종묘제례악]

신하의 음악적 재능 알아본 세종… 공식 행사서 쓸 음악 등 개발 지시
박연, '궁중 악기의 꽃' 편경 만들고 치밀한 고증으로 궁중악 정리했죠

최근 국립국악원이 오는 2월 2~3일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며 역대 최대 규모의 종묘제례악(祭禮樂) 공연을 펼친다는 뉴스가 전해졌어요. 종묘제례악이란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이자 유네스코에도 등재된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이랍니다.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종묘'에서 그들을 기리는 제사인 '종묘제례'를 지낼 때 연주한 음악과 춤을 가리키지요. 이런 문화 예술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데는 세종대왕과 박연이 큰 역할을 했어요.

◇박연의 재능 알아본 임금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때인 1418년, 당시 왕세자 교육을 담당했던 관청으로 세자시강원(侍講院)이 있었어요. 왕세자에게 유학(유교)과 역사를 가르치는 임무를 담당했는데, 그중 박연이란 인물도 있었지요. 박연은 1411년 문과(文科)에 합격해 집현전(학문 연구 기관)과 사간원(언론 기관)·사헌부(감찰 기관)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에 근무하고 있었어요.

 /그림=정서용

박연은 학문이 뛰어나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지만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도 매우 뛰어났어요. 가야금, 거문고, 장구, 북, 아쟁 등 여러 악기를 다룰 수 있었고 특히 피리를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잘 불었다고 해요. 하지만 당시 음악적 재능은 관료로서 성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특기는 아니었지요.

박연의 재능을 알아본 세자가 그해 8월에 왕위에 올랐는데, 바로 세종대왕이에요. 세종은 박연을 국가의 제사와 시호(왕·왕비나 학식 높은 선비가 죽은 뒤 받는 이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봉상시의 판관에 임명하면서, 음악에 관한 일을 처리하는 관청인 악학의 악학별좌에 임명했어요. 박연의 음악적 능력을 그대로 두기 아깝다고 생각한 거예요. 당시 세종은 새 나라 조선을 예절과 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유교적 이상 국가로 만들려는 뜻을 품고 있었거든요.

◇향악 대신 아악으로 통일하다

세종은 박연에게 궁중 내 행사나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 공식적으로 쓸 악기와 음악을 정리하라고 지시했어요. 당시 궁중음악은 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우리 전통 음악인 향악(鄕樂)과 당나라의 당악(唐樂), 송나라 때 전해진 아악(雅樂) 등이 섞여 있었고,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지요.

박연은 세종의 명을 받들어 향악 등 기존 음악을 악보로 정리·편찬하고 이를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만들고 개조했어요. 음의 높이를 정확하게 정한 12개 율관(律管)을 만들고, 그 율관을 통해 궁중 악기의 꽃이라 불리는 타악기인 '편경(編磬)'도 만들어냈지요.

또 각 악기의 음을 모두 정확하게 조율해 궁중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한 뒤, 향악 중심이었던 궁중음악을 아악 중심으로 정리해서 연주하고자 했어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음악인 '문묘제례악'은 아악을 중심으로 정리했고, 종묘제례악에도 아악을 연주하도록 했지요.

어느 날 종묘제례를 마치고 돌아온 세종이 이조판서 허조에게 물었어요.

"우리나라는 본디 향악에 익숙한데, 종묘의 제사에서 아악을 먼저 연주하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겨우 향악을 연주하고 있다. 조상 어른들이 평상시 들으시던 향악을 연주하는 것이 어떠한가?"

이처럼 세종은 궁중음악에 향악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박연은 '궁중음악으로는 향악보다 아악이 좋다'는 상소를 올렸고, 세종은 이 같은 의견을 받아들여 궁중음악을 아악으로 통일하고 개혁하도록 했답니다.

박연은 궁중음악을 아악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너무 마음을 많이 쓰다 병까지 얻었다고 해요. 그러나 치밀한 고증을 거쳐 궁중음악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본격적으로 아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했어요. 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의 향악곡 40여 곡을 수집해 이를 악보로 정리하기도 했어요.

이처럼 신하의 천부적 재능을 알아본 임금과,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최대로 발휘한 박연의 노력에 힘입어 오늘날 종묘제례악이 세계에서 인정받는 문화유산으로 남게 된 거예요.


[세종대왕은 작곡가]

"임금이 음률에 밝아 새로운 음악은 모두 임금이 만든 것인데, 막대기로 땅을 치면서 하룻저녁에 음악을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1년(1449년) 12월에 나오는 기록이에요. 세종은 음악에 조예가 깊었는데, 왕자 시절부터 비파와 거문고를 잘 다뤄 큰형인 양녕대군을 가르쳐줄 정도였어요.

세종은 여민락(與民樂)·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 등을 작곡했는데, 모두 향악을 변형해 만들었답니다. 백성이 함께 즐기자는 뜻의 여민락은 '용비어천가' 일부 대목을 가사로 삼은 곡으로 임금이 나들이할 때 사용했어요. 보태평과 정대업은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됐지요. 또 음의 높이와 길이를 나타낸 악보인 '정간보'도 만들었는데 이는 동양 최초라고 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