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노래 만든 정인보]
나라·아내 잃은 후 검은 옷만 입어
논밭 팔아 독립군 학교에 자금 지원, 國學 가르치며 민족 정신 지켜냈죠
이순신 유적 보존… 현충사도 중건
이번 주 목요일은 삼일절(3·1절)이에요.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만세 운동을 펼쳤는데 이를 기념하는 날이지요. 삼일절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늘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로 시작하는 '삼일절 노래'랍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돼 있기도 한 이 노래의 노랫말은 독립운동가 정인보(1893~1950년 추정) 선생이 만들었어요.
◇나라 밖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병합하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뜻을 품은 사람들이 '신민회'를 비롯한 비밀 독립운동 단체를 많이 조직했어요. 독립운동 단체들은 일제의 집요한 탄압을 피해 나라 밖에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어 적극적인 투쟁을 벌였지요.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1932)은 압록강 북쪽 지역인 서간도(현재 중국 연변 일대)에 독립운동 기지인 '삼원보'를 세우고 그곳에 '신흥강습소'라는 독립군 양성 학교를 만들어 수많은 독립군을 길러냈어요. 그 무렵 한 한국인 청년이 그를 찾아왔지요.
"선생님, 이 돈을 신흥강습소를 위한 자금으로 써 주십시오." 청년의 이름은 정인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부평의 논밭을 팔아 마련한 돈을 신흥강습소 운영에 보태겠다는 것이었어요. 이런 도움을 바탕으로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다시 정비해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많은 항일(抗日) 무장 독립투사들을 배출했답니다.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인보는 어려서 한문학과 유학(유교)을 공부했어요. 글 솜씨가 뛰어난 데다 재치가 넘쳐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요. 나라의 국권을 빼앗기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채호·박은식 등과 함께 '동제사'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했어요.
◇검은색 한복을 입고 다니다
"정 선생, 조국에서 슬픈 소식이 왔소. 정 선생의 부인이 아이를 낳다가 그만…." 1912년 9월 정인보는 고국에 있는 아내가 첫 딸을 낳은 지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어요. 급히 국내로 돌아온 정인보는 그때부터 줄곧 검은색 한복과 모자, 검은색 안경과 고무신 차림으로 다니기 시작했지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는 뜻이면서 나라 잃은 슬픔을 동시에 나타낸 것이었어요.
▲ 그림=정서용
정인보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대) 등에서 한문과 역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었고, 일간지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이순신 등 우리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뤄 국민에게 자긍심을 일깨워주었어요. 1926년 6월 10일 순종 황제 장례일에 6·10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며 도움을 주었고, 이충무공유적보존회 조직에 앞장서 퇴락했던 아산의 현충사를 중건(고쳐 지음)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정인보는 칼보다 붓으로 일제에 맞선 독립 투쟁 활동을 펼쳐나갔어요.
◇"내 친구 최남선은 죽었다"
일제는 1931년 중국 만주를 침략하고 1937년 중일(中日) 전쟁을 일으키며 영토 확대에 대한 야욕을 키웠어요. 그리고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깡그리 없애려는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을 폈지요. 수많은 한국 지식인을 협박하고 달래서 자기들의 침략 정책을 찬성하도록 만들었는데, 그렇게 변절한 인물 중에는 정인보와 무척 친한 친구였던 최남선(1890~1957)이란 인물도 있었어요.
최남선은 문인이자 언론인, 역사학자로 한때 독립운동에 앞장서며 3·1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썼던 인물이에요. 하지만 친일파로 돌아서며 조선총독부(일제의 최고 식민통치기구)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조선의 역사를 거짓으로 꾸미거나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는 작업에 앞장섰지요. 자신의 친구가 조국을 저버리고 노골적으로 친일 행위를 일삼자 정인보는 어느 날 최남선의 집을 찾아가 대문 앞에서 "이제 내 친구 최남선이 죽었다"며 통곡을 했다고 해요.
정인보는 우리나라와 관련된 학문을 일컫는 말로 '국학(國學)'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고,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흐르는 '얼'을 강조하며 꿋꿋하게 민족의식을 지켜나갔어요. 1945년 8월 15일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은 정인보는 그러나 6·25전쟁 때인 1950년 7월 북한군에 납치됐답니다. 이후 생존했는지 사망했는지 여부가 알려지지 않다가 그해 11월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어요.
☞4대 국경일 노랫말을 지은 정인보
정인보는 ‘흙 다시 만져보자/바닷물도 춤을 춘다~’로 시작하는 광복절 노래,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로 시작하는 개천절 노래, ‘비 구름 바람 거느리며 인간을 도우셨다는~’으로 시작하는 제헌절 노래 등 우리나라 4대 국경일 노래의 노랫말을 모두 썼어요. 초대 정부 지도자들이 국경일 노래의 노랫말을 누구에게 맡길까 고민하다가 정인보를 선택했다고 해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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