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사]
'이순신 전서' 제작·기념비 건립 등 조선 임금들, 충무공 업적 기렸어요
숙종 때 만든 현충사, 서원 역할하다 일제 때 모금 운동 통해 고쳐지었죠
얼마 전 문화재청이 충남 아산 현충사에 걸려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현판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어요.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명장(名將)으로 손꼽히는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사당(祠堂·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기리는 곳)인 현충사는 1706년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지은 '구(舊)현충사'와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은 '신(新)현충사'가 있는데요. 구현충사에는 숙종이 직접 쓴 한자 현판이, 신현충사에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쓴 한글 현판이 걸려있지요.
그런데 지난해 9월 이순신 가문 종가(큰집)의 맏며느리가 '신현충사 현판을 숙종이 내린 현판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어요. 이에 현충사를 관리하는 기관인 문화재청이 "신현충사에 걸린 박 전 대통령의 현판도 역사적 의미가 있다"며 현재처럼 그대로 두기로 결정한 거예요. 그렇다면 현충사는 언제 세워졌고, 숙종은 왜 현충사에 현판을 내린 것일까요?
◇이순신을 영웅으로 생각한 임금들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조선의 임금들은 전쟁 당시 바다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뒤 노량해전(1598년 11월)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이순신 장군을 위대한 영웅으로 여겼어요.
▲ /그림=정서용
1659년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은 이순신 장군이 전투를 벌였던 남해에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게 했지요. 그런 뒤 비문(비석에 새긴 글)을 보며 이순신 장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을 읽었는데,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다가 순절(충성심을 다하다 목숨을 버림)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중흥(中興·다시 일어나게 함)시키기 위해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1793년 제22대 임금 정조는 이순신을 영의정(조선시대 최고 관직으로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으로 추증(나라에 공이 큰 관리가 죽은 뒤 관직을 높여 주던 일)했고, 그의 신도비를 세워 직접 글을 지었어요. 신도비는 왕이나 고위 관리의 무덤이 있는 길목에 죽은 자의 업적을 새긴 비석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인물이 여기 묻혀 있으니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경건한 마음으로 지나가라'는 뜻에서 만드는 거랍니다.
◇"아산에 충무공 사당 세워달라"
정조는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록이나 이순신 장군이 남긴 글을 모두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해 책으로 펴내는 작업도 지시했어요. 규장각(조선 왕실 도서관)과 예문관(조선시대 임금의 말을 대신 짓는 관청)이 그 일을 맡아 했지요. 그 결과 1795년 '충무공 이순신전서(全書)'가 나왔어요. 정조는 이 책을 인쇄할 때 임금의 개인적인 재산인 '내탕금'을 내려주기도 했지요. 이처럼 왕이 나서 특정 관리의 개인 문집을 만든 과거 사례가 없었기에 일부 신하가 이에 반대했는데, 정조는 "이순신과 같은 신하가 100명 있다면 100명 모두에게 문집을 만들어주겠다"며 이를 단호히 물리쳤다고 해요.
현충사는 이보다 앞선 1706년 충남 아산에 세워진 사당이에요. 제19대 임금 숙종은 1704년 충청도에서 글공부를 하는 서후경이라는 선비에게서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받았어요. "천안에 사는 유생입니다. 충청도 유생들을 비롯한 백성들이 아산에 충무공 이순신의 사당을 세워주실 것을 청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자 그의 묘지가 있는 아산에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을 세워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어요. 숙종은 즉각 신하들에게 이 일을 지시했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706년 오늘날 구현충사가 세워졌답니다.
◇조선 말·일제 때 부침 겪은 현충사
다음 해인 1707년, 숙종은 '충성을 높이 기린다'는 뜻에서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이름을 지어 보내고 직접 쓴 현판을 내렸어요. 이를 사액(賜額)이라고 해요. 그때부터 구현충사는 지방 인재들에게 유교를 가르치는 사액 서원으로서 역할도 했지요. 숙종 임금은 다음과 같은 제문(제사 지낼 때 쓰는 글)도 지었어요.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로부터 있거니와 제 몸 죽여 나라를 건진 분은 이분에게서 처음 보네.'
그 뒤 구현충사는 1868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 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았어요. 일제시대에는 이충무공 묘소가 경매에 부쳐지며 일본인 손에 넘어갈 위기에 처했는데, 많은 민족 지사가 '이충무공 유적 보존회'를 조직하고 국민들을 상대로 모금 운동을 펼쳐 1932년 구현충사를 고쳐 지었지요. 이후 196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구현충사 위편에 대규모 신현충사를 새로 짓고 자신이 쓴 현판을 걸은 거예요.
[이순신과 아산은 무슨 관계?]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은 현재 서울시 중구 인현동이지만, 어릴 때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가 무예와 학문을 닦으며 청년으로 자라났어요. 이순신 장군 시신은 아산 금성산에 모셔졌다가 1614년 현재의 장소인 아산시 음봉면으로 옮겨졌답니다. 현충사는 이로부터 9㎞ 정도 떨어져 있지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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