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안창호 등 수많은 애국지사 갇힌 곳… 일제 때 모습으로 복원해요

bindol 2021. 11. 8. 05:04

[서대문형무소]

유관순·한용운 등 독립운동가, 일본 경찰이 마구 잡아들였죠
수양동우회 사건 180여 명 투옥도… 안창호, 모진 감옥살이로 끝내 순국

서울 서대문형무소가 일제시대인 1936년 때 모습으로 복원된다고 해요. 문화재청이 나라에서 보관 중인 1936년 당시 건물 배치 도면을 바탕으로 사적지를 확대하고 유물을 발굴하는 조사를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일제시대 때 구치감(감옥)과 창고, 의무실, 병감(병든 죄수를 가두는 감옥), 공장 등 중요한 공간도 복원할 방침이에요.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 유관순, 김구, 손병희, 한용운 등 수많은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이 갇혀 온갖 고생을 한 곳이에요. 1937년 무렵엔 민족 운동 단체인 '수양동우회'에 소속된 지식인 181명이 한꺼번에 우르르 형무소에 갇히는 일도 있었지요. 당시 체포된 독립투사 중엔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도 있었어요.

◇신민회와 흥사단을 조직한 안창호

1913년,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 중인 청년들이 '흥사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독립운동에 앞장설 젊은 인재를 기르기 위해 당시 미국에 머물던 안창호가 세운 단체였지요.

1905년 일제가 조선의 주권(국가의 뜻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을 빼앗는 내용의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미국에서 공부 중이던 안창호는 국내로 돌아와 1907년 '신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했어요. 일제에 맞서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벌였지요. 학교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젊은 민족 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한 노력을 했어요.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러던 중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흥사단을 만든 거예요.

안창호는 전국 8도를 대표하는 유학생들을 흥사단 창립위원으로 삼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한 여러 활동들을 펼쳤어요.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힘을 보탰지요. 상하이에 흥사단 해외 지부를 조직한 안창호는 1922년 서울에 수양동맹회, 평양에 동우구락부를 만들었어요. 두 단체는 흥사단 한국 지부 역할을 했지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형무소에 갇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1908~1932)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군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 사건이 벌어져요. 안창호는 이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고 일본 경찰에 체포됐지요.

국내로 옮겨진 안창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대전형무소로 이동해 2년 6개월간 옥살이를 치러야 했어요. 1935년 2월 가석방(일정한 조건 아래 죄수를 일찍 감옥에서 풀어주는 것)돼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어요.

 /그림=정서용

수양동우회란 1926년 흥사단 한국 지부인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를 합쳐 만든 민족 운동 단체였어요. 소설가 이광수를 중심으로 회원 82명이 활동했는데 회원들은 변호사·의사·교육자·목사 등 지식인들이 대부분이었지요.

이들은 회관을 세우고 '동광'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국민들에게 독립 정신을 심어주는 계몽 활동을 벌였어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 경찰이 1937년 6월부터 수양동우회와 연관된 지식인들을 마구 잡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이를 수양동우회 사건이라 부르는데 당시 서대문형무소 등 감옥에 끌려온 사람들은 안창호를 비롯해 이광수, 홍난파(음악가), 현제명(음악가) 등 181명이나 되었지요.

◇모진 감옥살이에 세상 떠나다

또다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안창호는 참혹한 감옥살이를 견디다 병을 얻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렀어요. 조선총독부는 안창호를 긴급히 풀어주었지만 그는 석방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38년 3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힌 180여 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안창호를 제외하고 이광수를 비롯한 총 41명이 재판에 넘겨졌는데, 1939년 경성지방법원은 이들에 대해 전원 무죄 선고를 했어요. 1941년 경성고등법원 상고심에서도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지요. 재판 과정에서 사건 관련자 중 많은 이가 친일파로 돌아서 일제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들을 처벌할 필요가 없었거든요.

특히 재판 중 건강 악화를 이유로 일찌감치 감옥에서 풀려난 이광수와 주요한(시인)은 이후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일삼았고, 1937년 수양동우회 해산을 선언하면서 각종 자금과 토지를 끌어모아 일제에 국방 헌금으로 바쳤어요. 반면 4년 5개월간 감옥에서 지내며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최윤세, 이기윤은 옥중에서 목숨을 잃었고, 김성업은 불구가 되었답니다.

☞서대문형무소의 역사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대한제국 시절 처음 생겼어요. 일제가 대한제국에 요청해 서대문에 ‘한성감옥’을 만든 것이지요.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일제는 한성감옥을 고쳐서 크게 짓고 이름을 ‘서대문감옥’으로 바꾸었어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다시 서대문감옥을 넓히고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서대문형무소는 ‘서울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어 다양한 범죄자들을 수용해오다 1998년 역사 교육의 현장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탈바꿈했답니다.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