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강력한 독립운동 위해… 대한민국 임정, 한성정부 통합했죠

bindol 2021. 11. 8. 05:13

[임시정부 수립]

3·1운동 후 곳곳에 임시정부 생겨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정 수립… 9월 이승만 한성정부와 통합했죠
임정 수립일 4월 11일로 변경했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 내년부터 4월 11일로 바뀐다고 해요.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매년 4월 13일을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로 삼고 기념해왔는데, 내년 100주년 기념식부터는 날짜를 이틀 당겨 축하하겠다는 거지요. 그동안 많은 역사학자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국호(國號·나라 이름)와 임시 헌장(憲章·규범)을 제정한 4월 11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는데, 이를 정부가 받아들인 것이라고 해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여럿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오늘은 우리 역사 속 임시정부 수립 과정을 알아볼게요.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임시정부란 말 그대로 임시로 만든 정부를 뜻해요. 헌법에서 정한 적법한 절차를 통해 만든 정부가 아니고, 또 국제법상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은 정부도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지요.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세워진 시기는 1919년인데, 이때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었어요. 그래서 정식으로 우리 민족 스스로 정부를 세울 수 없었지요.

 /그림=정서용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영국·프랑스·미국·러시아 등 연합국은 전쟁 후 처리를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베르사유 회의'를 열었어요. 이때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채택했지요.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오스만튀르크(현재 터키) 등 전쟁에서 진 국가의 식민지가 줄줄이 독립을 이루었어요.

일제 지배 아래 있던 우리 민족도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중국과 일본 등지에 있던 독립운동가·유학생들이 잇따라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지요. 이런 흐름 속에 국내에서 1919년 3월 1일 일제에 항거하는 전국적 만세 운동이 펼쳐졌어요. 일제는 헌병과 경찰, 군대까지 동원해 탄압했지요. 그러자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펼쳐나가려면 정부 조직이 필요하다'고 뜻을 모읍니다.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세워지다

1919년 3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회'라는 임시정부 성격의 단체가 만들어졌어요. 이어 4월 10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됐지요. 국내에도 3·1운동 정신을 이어나가겠다며 4월 23일 전국 13도를 대표하는 민족주의자들이 모여 '한성 임시정부'를 만들었어요. 그 밖에 중국 만주나 미국 등지에도 임시정부가 여럿 생겨났어요.

국내외 곳곳에 세워진 임시정부 가운데 상하이에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 공화제로 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10조 임시 헌법인 '임시 헌장'을 만들었어요. 국내에 조직된 '한성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대통령)로 하는 정부 관료를 12명 임명하고 미국 워싱턴에 집정관 총재 사무소를 개설했지요.

하지만 임시정부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보니 힘을 하나로 모아 강력한 독립운동을 펼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민족 지도자들이 수차례 모여서 의논한 끝에 1919년 9월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기로 합니다.

1919년 9월 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성 임시정부가 '제1차 개헌(改憲·헌법을 고침)'이라는 형식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합쳐졌어요. 국가의 주된 이념은 국내에 세워진 한성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되, 정부 위치는 활동과 연락이 편리한 중국 상하이에 두고, 행정 체계는 한성 임시정부가 짠 내각 구성을 그대로 따르자는 것이었지요.

그 뒤 비밀 연락망을 조직하고, 유럽·미국 등 서양 강대국에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나타내는 다양한 외교 활동을 벌였어요. 1937년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자(중·일 전쟁) 중국 땅 이곳저곳으로 본거지를 옮기기도 했지만, 곧 '광복군'이라는 군대를 창설해 일본군과 맞서 항일 투쟁을 벌이는 등 무장(武裝) 독립운동을 꾸준히 펼쳐나갔지요.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방식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 일제의 탄압과 감시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어요. 하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랍니다.


[왜 임시정부 수립일은 4월 13일이었을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대외적으로 공포된 때가 4월 13일이라는 주장에 따른 것이에요. 1932년 출간된 '조선민족운동연감'에 근거한 것인데, 해당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왔지요. 반면 '대한민국임시의정원기사록 제1회집'에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가 4월 10일 밤 10시에 열려 11일 오전 10시에 마쳤다고 기록돼 있어 실질적으로 4월 11일에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주장이 많았어요. 또 임시정부도 1937년부터 매년 4월 11일을 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했답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