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장수와 왕]
큰아버지 피해 궁궐서 도망친 을불… 서해 염전 소금 내다 팔며 살아가
대신들 추대로 고구려 왕 올랐어요
정부, 소금 생산 기술 문화재 지정
최근 문화재청이 갯벌을 활용한 우리나라의 고유 소금 생산 기술인 '제염(製鹽·소금을 만드는 것)'을 국가 무형(無形)문화재로 지정했다는 뉴스가 있었어요. 무형문화재란 춤이나 노래, 공예나 기술처럼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을 말해요. 제염은 삼국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개발한 오랜 전통 기술일 뿐 아니라 과학적인 제조 기법으로 전 세계에 널리 자랑할 만한 것이지요.
그런데 소금하면 떠오르는 역사 속 인물이 바로 고구려 제15대 왕인 미천왕(美川王)이랍니다. 미천왕은 소금 장수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요. 어떻게 소금 장수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걸까요?
◇고구려의 소금 장수 을불
"소금 사려~! 소금 사려~!"
지금으로부터 1700여 년 전 고구려의 한 고을. 허름한 옷차림을 한 어린 소년이 소금을 팔고 있었어요. 소년의 이름은 '을불'. 고구려 제13대 왕인 서천왕의 손자이자 제14대 봉상왕의 조카였지요. 봉상왕은 서천왕의 큰아들로 292년 왕위에 올랐는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백성의 존경을 받던 작은아버지를 살해하고 자기 동생인 돌고까지 반역죄로 몰아 죽였어요. 형의 손에 세상을 떠난 돌고의 아들이 바로 을불이었는데, 봉상왕은 혹시 모를 후환을 없애기 위해 조카인 을불마저 죽이려 했지요.
▲ /그림=정서용
큰아버지 봉상왕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 있던 을불은 간신히 궁궐을 빠져나와 신분을 감추고 살았어요. 부잣집 머슴살이도 하고 '제모'라는 소금 장수를 만나 서해안 염전에서 소금을 받아 배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소금을 팔러 다녔지요.
그러던 중 고구려에 몇 년째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먹고살기 매우 힘들어졌는데, 봉상왕은 화려한 궁궐을 짓고 그 안에서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 원성이 자자했어요. 당시 최고 관직인 국상(國相)이었던 '창조리'라는 인물이 이를 말렸지만 봉상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보다 못한 창조리는 대신들과 뜻을 모아 봉상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왕을 모시려 했는데, 그들이 새롭게 모시려던 왕이 바로 을불이었지요.
을불은 왕이 되자 중국 한나라가 고구려에 설치했던 낙랑군(오늘날 평남 대부분과 황해도 일부)과 대방군(오늘날 한강 이북 경기도 지방)을 몰아내고 영토를 크게 넓히는 등 고구려가 성장하는 바탕을 마련했어요. 이런 이야기는 고려시대 최고 학자인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속 '고구려 본기'에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백제의 마 장수, 무왕이 되다
미천왕처럼 아주 낮은 처지에 있다 왕위에 오른 또 다른 인물이 있는데요. 마 장수로 지내다 왕이 된 백제 30대 무왕(武王)이랍니다. 홀어머니와 살면서 어려서부터 마를 캐다 시장에 팔아 생계를 꾸려나갔던 그는 '마를 캐는 아이'란 뜻으로 '서동(薯童)'이라 불렸어요.
서동은 옆 나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주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의 도읍지로 몰래 들어갔어요.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자기가 캔 마를 나누어주며 '선화공주가 서동과 사랑을 나누는 사이다'라는 거짓 내용을 담은 노래(서동요)를 부르게 했지요. 이상한 소문에 휩싸인 선화공주는 결국 궁궐에서 쫓겨났고, 서동이 그런 선화공주를 집으로 데려와 아내로 삼았다는 이야기예요. 훗날 무왕이 된 서동은 선화공주의 부탁으로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에 미륵사라는 큰 절을 세웠다고 해요.
무왕은 '삼국사기'에 백제 제29대 법왕의 아들로 기록돼 있지만, 중국의 역사책 '북사'에는 제27대 위덕왕의 아들로 기록돼 있어요. 법왕의 아버지는 제28대 혜왕이고, 혜왕은 제26대 성왕의 둘째 아들이자 위덕왕의 동생이지요. 혜왕과 법왕은 위덕왕이 죽자 세자를 제치고 왕위를 차지했는데, 두 사람 모두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죽자 무왕이 법왕의 뒤를 이었다는 것이에요. 이에 일부 역사학자는 무왕이 위덕왕과 정실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닌 데다, 혜왕과 법왕을 따르는 세력에게 죽임을 당할지 몰라 시골에서 홀어머니와 숨어 살았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무왕은 600년 왕위에 올라 40년 이상 나라를 통치했는데,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애쓰고 중국 수나라·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으며 백제의 중흥을 위해 힘썼답니다.
[선화공주와 미륵사]
무왕은 당시 백제의 도읍지였던 사비(지금의 부여)가 아닌 익산에 왕궁을 짓고 미륵사라는 거대한 절을 세웠어요. 그런데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금판에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무왕의 왕후가 기해년(639년)에 지은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어 논란이 됐답니다. 즉, 무왕의 왕비가 백제 귀족의 딸이었다는 말인데요. 이에 역사학자들은 '선화공주와 결혼했던 무왕이 다시 사택적덕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사실 선화공주는 백제 귀족의 딸이었다' 같은 추정을 하고 있어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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