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왕을 낳은 후궁 7명 기린 사당… 영조가 生母 위해 처음 세워

bindol 2021. 11. 8. 05:20

[청와대 서쪽 칠궁(七宮)]

숙종과 무수리 사이 태어난 왕 '영조' 즉위 직후 친모 기린 육상궁 세웠죠
1900년대 초 후궁 6명 사당과 합쳐… 칠궁, 내달부터 일반 관람객에 개방

오는 6월부터 조선시대 왕을 낳은 7명의 후궁을 기리는 사당(조상의 위패를 모신 곳)인 '칠궁(七宮·사적 제149호)'이 일반에게 개방된다고 해요.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칠궁은 청와대 경계와 맞닿아 있어 그동안 청와대 특별 관람객에게만 제한적으로 관람을 허용해왔는데, 앞으로는 일반 관람객들에게도 개방하겠다는 것이지요.

이곳은 원래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의 친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어요. 그러다 1909년부터 1929년 이곳에 6개 사당이 이사를 오면서 총 7개 사당이 되었기 때문에 '칠궁'이라 부르게 되었지요. 칠궁에 모셔진 여인들은 모두 조선 후기 역대 왕이나 왕으로 추존(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왕의 칭호를 올리는 것)된 이들을 낳은 후궁들이었답니다. 과연 당시 그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기사환국이 일어나다

1688년,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의 사랑을 받던 후궁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어요. 왕자가 없던 숙종은 크게 기뻐하며 아기를 원자(세자에 아직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로 삼으려 했지요. 하지만 훗날 원자가 왕위를 계승할 세자로 책봉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대신들의 반대가 심했어요. 특히 권력의 중심에 있던 서인(조선시대 붕당의 한 정파) 세력과 그 우두머리인 송시열(1607~1689)은 "아직 중전(왕비)이 젊은데 후궁이 낳은 왕자를 원자로 삼는 것은 안 될 일"이라며 강하게 반대했지요.

당시 숙종의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는 왕자를 낳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숙종의 사랑을 듬뿍 받던 후궁 장씨가 왕자를 낳자 숙종이 너무 기쁜 나머지 원자 칭호를 내리려 한 거예요. 결국 숙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듬해인 1689년 장씨가 낳은 왕자 윤을 원자로 삼고 장씨를 정1품 '희빈'으로 높여 주었답니다. 바로 여기서 나오는 장씨가 역사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장희빈(희빈 장씨)'입니다.

그 뒤로도 서인들이 계속 원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고 서인들을 조정에서 쫓아냈어요. 그러자 서인의 반대 세력이던 남인 측에서 권력을 장악했지요. 친정아버지가 서인 세력에 속했던 인현왕후는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고 희빈 장씨가 새 왕비로 책봉됐어요. 이를 기사년(1689년)에 불어닥친 변화라고 해서 '기사환국'이라 불러요.

◇미천한 신분에서 숙빈에 오르다

1692년, 숙종이 궁궐을 거닐다 한 무수리(청소를 도맡던 궁녀)가 자기 방에서 음식을 차려놓고 무언가 간절하게 비는 모습을 보았어요. 숙종이 까닭을 물으니 무수리가 대답했어요. "소인은 인현왕후를 모셨는데 내일이 중전마마 생신이라 상을 차려놓고 마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당시 희빈 장씨에 대한 숙종의 열정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어요. 숙종은 그 무수리를 기특하게 여기고 가까이 지내다 결국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답니다. 이후 1694년 숙종과 무수리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 이금이에요. 연잉군을 낳은 무수리는 '숙빈 최씨'이지요.

 그림=정서용

그해 조정에는 '갑술환국'이 일어났어요. 숙종이 서인 세력을 비난해온 남인 세력을 조정에서 쫓아내고 다시 서인을 불러들인 사건이지요. 희빈 장씨도 남인과 함께 조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고 '빈'으로 강등됐답니다. 이에 따라 폐비로 지내던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돼 궁궐로 돌아왔지요. 하지만 인현왕후는 병을 얻어 몇 년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숙종은 희빈 장씨 같은 일이 다시 생길 것을 염려해 '후궁은 왕비에 오를 수 없다'고 선언하며 유력 가문의 딸을 새 왕비(인원왕후 김씨)로 맞았어요.

◇칠궁에 모셔진 왕의 생모들

1720년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희빈 장씨가 낳은 맏아들 이윤이 왕위(조선 제20대 경종)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원래 몸이 허약했던 경종은 세자를 두지 못했어요. 1724년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숙빈 최씨의 아들이었던 연잉군이 왕(영조)이 되었습니다.

영조는 친어머니 숙빈 최씨를 위해 사당을 짓고 이를 '숙빈묘'라 불렀어요. 그리고 1753년 이를 '육상궁'으로 승격시켰지요. 이후 16대 임금 인조의 아버지 원종(추존왕)의 생모를 기리는 저경궁,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를 기리는 대빈궁, 영조의 맏아들인 진종(추존왕)의 생모를 기리는 연호궁,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생모를 기리는 선희궁, 23대 임금 순조의 생모를 기리는 경우궁이 속속 이전하면서 이를 아울러 '육궁(六宮)'이라 불렀어요. 그러다 1929년 26대 임금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인 영친왕의 생모를 기리는 덕안궁까지 옮겨와 '칠궁(七宮)'이 됐답니다.

☞후궁의 품계

조선시대 궁궐 여인들은 내명부(內命婦)라는 조직에 속했어요. 1~4품인 후궁과 5~9품인 궁녀로 나뉘었지요. 후궁 중 가장 높은 품계는 정1품 빈이었고, 종1품 귀인, 정2품 소의, 종2품 숙의, 정3품 소용, 종3품 숙용, 정4품 소원, 종4품 숙원 순이었어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