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뉴스 속의 한국사] "사도세자 억울함 풀어달라"… 조선시대 첫 연대 청원이죠

bindol 2021. 11. 8. 05:23

[만인소]
1만여 명이 임금에 올린 상소, 만인소… 서얼 차별·의복 개혁 반대 등 다양해

얼마 전 조선시대의 '만인소(萬人疏)'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 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는 뉴스가 전해졌어요. 만인소는 '1만여 명이 임금에게 올린 글'이란 뜻으로, 하나의 상소문에 1만여 명이 연대 서명을 해서 자기들 의견이나 주장을 임금이나 조정에 올리는 것을 말해요. 조선시대 처음 행해졌는데 오늘날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이 잘못된 정책이나 제도를 고쳐 달라고 요청하는 국민 청원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유네스코가 인정한 기록유산인 만인소는 왜 작성된 것이었을까요?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소서!"

1792년 봄,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영남 지방 유생(儒生·유학을 공부하는 선비) 1만57명의 이름이 줄줄이 쓰인 거대한 상소문을 받았어요. 상소의 내용은 사도세자를 모함해 죽인 무리들을 처벌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는 것이었지요. 사도세자(1735~1762)는 21대 임금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로, 세자 시절 아버지 영조와 갈등을 벌이고 미움을 받아 뒤주(곡식을 담는 나무 궤)에 갇혀 세상을 떠난 비극적인 인물이에요.

 그림=정서용

"1만명 넘는 유생이 뜻을 한데 모아 서명을 하여 올린 것이로구나! 소두(疏頭·상소에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가 누구인가?"

"안동에서 유생들을 가르쳤던 이광정의 아들 이우입니다."

정조의 명령에 따라 대표자인 이우가 궁궐로 들어와 상소문을 낭독했어요. 정조는 울음을 삼키느라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지경이었지만, "사도세자의 문제는 거론하지 말라는 영조 임금의 명령을 생각해서 신중해야 한다"며 상소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했답니다. 대신 정조는 상소문 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역사에 남도록 하였어요.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만인소예요.

◇7건 중 하나만 받아들여지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1855년, 25대 임금 철종 때 사도세자에 대한 만인소가 다시 올라왔어요. 사도세자의 추존(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왕의 칭호를 올리는 것)을 주장하는 상소였는데, 이번엔 1만94명의 영남 유생이 서명해 올린 것이었지요. 이번 유네스코 아태지역 기록유산에 등재된 만인소가 바로 이 상소문이에요.

1884년 작성된 '복제(服制) 개혁 반대 만인소'도 유네스코 유산에 올랐는데요. 개화를 추진하던 조선 정부에서 전통 의상인 도포 등을 폐지하고 좁은 소매의 옷을 강제로 입도록 하는 의복 제도 개혁을 단행하자 유학자 이재교 등 전국의 유생 8849명이 '복제 개혁은 조선의 전통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연대 서명한 것이에요.

이 같은 조선시대 만인소는 모두 7건으로, 그중 5건을 영남 지역 유생들이 작성했어요. 이 가운데 사도세자에 관한 내용이 2건이지요. 이는 조선 후기 노론(붕당 중 하나) 세력에 밀려 중앙 권력에서 멀어진 영남 지역 남인 세력들이 자기들의 정치적 입장이나 의견을 만인소를 통해 나타내려 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아요. 생전에 노론을 견제하고 남인과 소론을 가까이했던 사도세자를 추존해 영남 선비들이 힘을 모으려고 했다고 할 수 있지요.

이 밖에 서얼(양반과 첩 사이에 태어난 자식)도 관직에 차별 없이 등용할 것을 요구하는 1823년 만인소,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 철폐 명령에 반대하는 1871년 만인소 등이 있었답니다. 그러나 7건의 만인소 중 실제 정부 정책에 영향을 준 것은 1881년 있었던 '영남 만인소 사건'뿐이었지요.

◇"개화에 반대한다" 영남 만인소 사건

1880년 수신사(개항 이후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청나라 외교관이 쓴 '조선책략'이란 책을 고종에게 바쳤어요. 그는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조선이 개화·외교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조선책략'에는 조선이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대책으로 중국과 친교를 맺고 일본과 결속하며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고종은 조정 회의를 통해 이 같은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와 수교하겠다고 밝혔어요.

그러나 당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던 유생들은 고종의 결정에 크게 반발했어요. 1881년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을 소두(대표)로 한 영남 유생들은 만인소를 올리고 "'조선책략'을 불태우고 김홍집을 벌하라"며 극렬히 반대했지요.

고종은 결국 만인소를 받아들여 김홍집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조선책략'을 근거로 한 외교정책을 철회했어요. 하지만 이듬해인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며 개화 정책을 다시 펴나갔고, 얼마 뒤 김홍집을 다시 조정에 불러들였답니다.

☞길이가 100m 넘는 상소문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는 폭 1.11m, 길이 96.5m에 무게만 16.6㎏에 달하고, '복제 개혁 반대 만인소'는 폭 1.02m, 길이 100.36m에 무게가 8.3㎏이라고 해요. 각각 도산서원과 옥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존하고 있어요.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박세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