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빙고(石氷庫)와 조상들의 여름나기]
왕실과 고위 관료들이 주로 이용… 백성들은 삼베 입고 등목하며 피서
30일 서울 지역이 9일 연속 열대야를 기록하는 등 유난히 더운 여름이 계속되고 있지요. 폭염 때문에 일사병 등 온열 질환 환자가 크게 늘고 사람들은 더위에 지쳐가고 있어요. 폭염이 길어지자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폭염을 자연 재난에 포함해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며 종합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지요. 폭염(暴炎)은 사납다는 뜻의 폭(暴)과 견디기 힘든 모진 더위를 뜻하는 염(炎)자가 합쳐진 말로 우리말로는 불볕더위라고 해요. 지금이야 선풍기나 에어컨이 있지만 이런 냉방 기기가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불볕더위를 견뎌냈을까요?
◇"활인원 병자들에게 얼음을 내려주어라"
조선 제4대 왕 세종 때인 1434년 여름이었어요. 날씨가 너무 더워 나라 안에는 열병을 앓는 사람이 들끓었어요. 양반이나 형편이 나은 백성은 그 나름대로 열병을 치료하는 약이라도 지어 먹었지만 가난한 백성은 별다른 방책이 없어 더위에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끙끙 앓거나 죽어 나갔지요.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던 동·서 활인원에는 열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몰렸어요. 활인원을 관리하던 예조에서는 임금에게 이를 보고하며 다음과 같이 아뢰었어요. "동·서 활인원의 열병을 앓는 사람들이 심한 더위로 크게 고생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부순 얼음을 주도록 하옵소서."
▲ /그림=정서용
세종은 예조의 건의에 따라 동·서 활인원에 얼음을 내려주게 했는데 이런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에 나와요. 종묘에서 초가을에 지내는 큰 제사에 얼음을 쓰게 한 일, 종친과 대신의 장례나 중병이 걸린 신하에게 얼음을 내려준 일 등도 적혀 있습니다. '경국대전'에는 해마다 여름철 끝 달, 즉 음력 6월에 여러 관청과 종친, 정3품 이상 관리, 활인서의 병자들과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 얼음을 주라는 규정이 나오기도 해요. 퇴직한 고위 관료에게도 얼음을 줬죠. 이들은 일종의 얼음 교환권인 빙표(氷票)를 장빙고에 내고 얼음을 타 갔어요.
◇'그림의 떡'이었던 얼음
냉장고가 없던 조선시대에도 얼음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지요? 우리 조상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인 석빙고(石氷庫)를 만들어 겨울철에 언 얼음을 보관했다가 무더운 여름에 꺼내 썼어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제3대 유리왕 때 이미 얼음 창고를 지었고 지증왕 6년(505)에 얼음을 보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해요.
고려 땐 평양에 얼음을 저장하는 석빙고가 내빙고와 외빙고로 나뉘어 있었지요. 고려 문종 때부터 해마다 음력 6월부터 입추(立秋)까지 벼슬에서 물러난 공신에게는 3일에 한 번, 고급 관리들에게는 7일에 한 번씩 얼음을 나누어주는 것을 제도로 삼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양에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었고 창덕궁에도 내빙고라는 얼음 창고를 따로 두어 얼음을 보관하고 관리했어요. 동빙고에 있는 얼음은 왕실에서 제사 음식을 신선하게 올리는 데 썼고,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과 고위 관료들이 썼지요.
이 밖에 경북 경주·안동, 경남 창녕, 대구 현풍 등 전국 여러 곳에 석빙고가 만들어지기도 했어요. 경주 석빙고는 신라시대에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조선 영조 17년에 만든 것이에요. 고려 초기에 만든 북한 해주 석빙고도 조선 영조 때 다시 고쳐 지어 지금은 북한 국보 문화유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얼음을 썼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지만 얼음으로 더위를 잠깐이나마 식힐 수 있는 사람은 신분과 지위가 높은 아주 일부뿐이었어요. 게다가 강촌에서는 겨울이 되면 살을 에는 추위에 변변한 옷도 갖춰입지 못하고 언 강에서 얼음을 캐는 일에 동원되는 백성도 있었어요.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 아니 '그림의 얼음'이었지요.
◇이열치열로 여름 난 조상들
그렇다면 평범한 백성들은 더위를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여름철엔 가볍고 바람이 잘 통하는 옷감인 모시로 만든 옷을 입었어요.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은 삼베로 옷을 만들어 입었지요.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땀을 식히거나 시원한 대나무를 이용해 만든 죽부인에 기대 열대야를 이겨내기도 했어요. 평민과 아이들은 윗옷을 벗고 등목을 하거나 가까운 개울에서 멱을 감았습니다. 양반은 체면을 중시해 인적이 드문 계곡을 찾았어요. 바위에 걸터앉아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쫓는 탁족(濯足)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닭백숙이나 팥죽을 끓여 먹으며 이열치열(以熱治熱)로 더위에 지친 몸을 보호하려 했죠. 더울 때 찬 음식을 자주 먹으면 위장과 간이 제 기능을 못해 병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이에요. 특히 삼복 더위에 팥죽을 끓여 먹으면 더위와 함께 스며드는 나쁜 기운을 쫓고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참외나 수박을 우물에 담가 두었다가 시원하게 먹기도 했어요.
조상들은 소박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지혜로운 방법을 동원해 무더운 여름을 나려 했답니다. 아무리 무더위가 심해도 리모컨 몇 번만 누르면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선풍기와 에어컨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지 않은가요?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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