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의 땅의 歷史] “창자가 바뀌고 사상이 바뀌어 전날의 내가 아닙니다”

bindol 2021. 12. 5. 03:39

248. 불꽃처럼 살아간 혁신유림① 류인식과 협동학교(協東學校)

백하구려의 바윗돌.
입력 2021.02.10 03:00
 
 
 
 
 

의성 김씨 집성촌인 경북 안동 내앞마을에 ‘백하구려(白下舊廬)’라는 집이 있다. 백하(白下) 김대락이 살던 집이다. 사랑채 앞 화단에 바윗돌이 하나 있다. 김대락 종증손 김시중(84)은 “귀신 나오는 바위”라고 했다. 그것도 의병한테 총 맞고 칼 맞아 죽은 귀신. 이 귀신 이야기 주인공은 청나라 사람 양계초(梁啓超)와 단재 신채호와 동산 류인식과 집주인 김대락과 김동삼과 석주 이상룡이다. 20세기 초 아수라장이 된 나라를 위해 생명과 재산을 바친 안동 혁신유림(革新儒林) 이야기.

안동 '협동학교' 교직원. 윗줄 왼쪽 끝이 일송 김동삼이고 가운데 왼쪽 끝이 동산 류인식이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248. 불꽃처럼 살아간 혁신유림① 류인식과 협동학교(協東學校)

시대의 금서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조선이 문호를 막 개방하려던 1870년대 조선 지식인들은 청나라 사람 위원이 쓴 ‘해국도지(海國圖志)’에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은 황제국 청(淸)과 조선과 기타 오랑캐가 사는 수직적 천하(天下)인 줄 알았는데, 그 책에는 오랑캐가 아닌 ‘막강한 서양(西洋)’이 있고 ‘세계(世界)’가 있다고 적혀 있었다. 성리학적 질서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신세계였다.

청과 일본 지도자들은 이 책을 통해 자강(自强)과 개화(開化)로 방향을 바꿨다. 조선에서는 개화파 시조 박규수와 김옥균, 유길준 같은 제자들이 개화를 꿈꿨다. 세월은 막 흘러갔고 청은 자강에 실패했고 조선 또한 자강에 대실패했다. 자강론자였던 청 학자 강유위(康有爲)의 제자 양계초가 그 실패를 징비하며 쓴 책이 자기 호를 딴 ‘음빙실문집’(1903)이다.

책은 신랄하고 정교했다. ‘나라를 망가뜨리는 새로운 방법(滅國新法論·멸국신법론)’, 근대 시민사회 자유와 평등을 설명한 ‘신민설(新民說)’, 강병을 논한 ‘논상무(論尙武)’와 ‘방관자를 꾸짖는 글(呵傍觀者文·가방관자문)’. ‘…열강은 날마다 전쟁을 멈추자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군비 확장을 안건으로 꾸민다. 문약한 구습을 바꾸지 않는다면 호랑이 무리 사이에 야윈 양을 세워놓는 셈이니 어찌 통째로 잡아먹히는 것을 면하겠는가!’(’논상무') 공맹의 도덕률이 아니라 약육강식 법칙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규라는 주장이었다.

‘음빙실문집’은 곧바로 조선 개화파 지식사회로 전파됐다. 신채호도 음빙실문집을 읽었고 안창호도 음빙실문집을 읽었고 훗날 만해 한용운도 음빙실문집을 읽었다. 1910년 나라가 망하고 석 달 뒤 조선총독부는 ‘신문지법’에 의거해 ‘안녕질서를 해치는 금서(禁書)’ 51권을 공포했는데, 그 가운데 음빙실문집이 들어 있었다.(1910년 11월 19일 ‘조선총독부 관보’)

신채호와 교류하며 대각성을 한 안동 혁신유림 동산 류인식./경북독립운동기념관

창자까지 바뀐 류인식과 혁신유림

안동에 살던 류인식(1865~1928)은 완고한 성리학자였다. 퇴계학파인 척암 김도화 제자로 1896년 단발령에 반대해 일어난 의병에 참가한 위정척사파 선비였다. 류인식에게 신문물은 악(惡)이었다. 영남에 살던 양반들은 대부분 그랬다. 오죽하면 ‘황성신문’은 영남을 일러 ‘옛것을 지키려는 성질이 편벽, 고루함으로 변한 조선 최고의 완고한 사람들’이라고 했을까.(1908년 9월 24일 황성신문 ‘嶠南의 一雷’)

1903년 그 편벽한 류인식이 서울로 올라가 단재 신채호를 만났다. 신채호는 “고루한 영남도 서학(西學) 즉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류인식은 거부했다. 그러자 신채호는 그에게 “나를 못 믿겠다고 하시니 이 책을 한번 보시라”며 ‘신서(新書)’ 몇 권을 주었다.

훗날 그가 스승인 김도화에게 편지를 쓴다.

‘책을 읽으니 전 지구상 바람과 말이 미치지 못했던 것들이 형형색색으로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들고 정신을 아찔하게 하여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포연(砲煙)과 비 오듯 떨어지는 총탄이 고집스러운 꿈을 강타하니 오직 새로워져야 한다는 의지가 생겨나면서 사상이 일변함을 깨달았습니다. 창자와 배(마음)가 바뀌어(腸肚換矣·장두환의) 전날의 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非復前日之寅植·비복전일지인식).’(류인식, ‘동산전집’, ‘上金拓庵先生·상김척암선생·척암 김 선생께 올리다·1908’)

내앞마을에 있는 김동삼 생가. /박종인 기자

철갑선이 조선 바다를 점령하는 판국에, 무기도 전술도 대중적 조직도 없이 충만한 기개만으로는 새 세상을 맞을 수 없다는 대각성이었다. 뒷날 류인식이 쓴 ‘학범(學範)’에는 “양계초의 저작을 취하여 썼다”고 적혀 있으니, 신채호가 준 ‘신서’ 또한 조선 지식인계를 강타한 음빙실문집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류인식은 성리학과 결별하고 신학문에 발을 디뎠다.

류인식은 “민권 신장과 민지(民智) 개발만이 국세를 만회하고 민족을 보존하는 길”이라며 교육입국을 선언하고 스스로 삭발하고 양복을 입었다. 전향한 이 척사파는 아버지 류필영으로부터 절연(絶緣)당했고 스승 김도화로부터 파문당했다. 류인식은 굽히지 않았다. 정중하되 날카롭게, 그가 스승을 이리 비판했다. “머리칼이 중하다면 몸 또한 중한데, 지금 몸이 없어지려 하는 판에 한 줌 머리칼로 호들갑을 떨면서 이빨 빠진 질문을 하고 있습니까?”(앞 편지)

 

류인식처럼 서구 신사상을 받아들여 계몽운동을 펼친 안동 유림들을 ‘혁신유림(革新儒林)’이라고 한다. 이들은 기존 유림들로부터 거친 저항을 받으며 계몽운동을 주도했다.

고종의 칙령과 협동학교

저항은 심각했다. 류인식은 곧바로 신식학교를 만들지 못했다. 을사조약 체결 넉 달 뒤인 1906년 3월 26일, 고물이 된 나라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은 “부국(富國)을 위해 자제를 학교에 안 보내면 죄를 논한다”며 전국에 학교를 세우라고 명했다.(1906년 3월 26일 ‘고종실록’)(고종은 20일 뒤 “성리학 발전을 위해 성균관 교육을 강화하라”고 모순적인 명을 내리기도 했다.) 황명이 떨어졌으니 혁신유림에게는 호기였다. 보수 유림들이 반대할 기세가 꺾인 것이다.

1907년 류인식은 학교를 설립했다. 의성 김씨 일송 김동삼과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도 함께였다. 이름은 ‘협동학교(協東學校)’다. 안동군 동쪽 7개 면이 힘을 합하여 동국(東國)에 만든 학교라는 뜻이다. ‘명문 가문들이 구습의 잘못됨을 깨닫고 신사상을 발휘했으니 문명 발달의 기관이며 사회 단합의 기원이라 하노라.’(1908년 9월 24일 ‘황성신문’)

과목은 수신(修身), 국어, 역사, 미술, 대수, 지리, 화학, 생물, 동물, 창가, 체조 등 17개였다. ‘음빙실문집’도 교재로 쓰였다. 교사는 의성 김씨 문중과 전주 류씨 문중에서 나왔다. 훗날 만주에서 ‘만주 호랑이'라고 불린 김동삼도 교사로 일했다. 계몽운동 결사조직인 서울 신민회(新民會)에서도 교사를 파견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신학문에 개안을 하고 계몽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망국 후 이들 혁신유림은 간도로 망명해 독립투쟁을 이끌었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의성 김씨 종손 김병식을 교장으로, 문중 서당인 내앞마을 가산서당에 문을 연 협동학교는 1909년 내앞마을 원로 김대락의 사랑채로 교실을 옮겼다. 백하 김대락 또한 완고한 척사파였다. 그런데 매부인 이상룡이 지회장으로 있던 계몽단체 ‘대한협회’ 기관지를 읽고 개안을 한다.

‘다 늙어 주검처럼 어둡게 살다가 대한협회서를 읽으니 심폐를 찌르듯 말마다 절실하여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김대락, ‘讀大韓協會書有感·독대한협회서유감’)

김대락은 ‘거울도 때가 끼면 장님과 같다’며 자기 집 50칸짜리 사랑채를 교실로 내놨다. 영남을 비난하던 ‘황성신문'도 깜짝 놀랐다. ‘김대락씨가 신교육을 언급하는 자를 대성질책하고 극력반대하더니 영남 교육계에 새 붉은 깃발(赤幟·적치:’전범’이라는 뜻)을 세웠도다.’(1909년 5월 8일 ‘황성신문’)

경상북도 안동 임하면 내앞마을에는 ‘백하구려’가 있다. 독립운동가 백하 김대락이 살던 옛 집이다. 김대락은 안동 혁신유림 동산 류인식이 만든 ‘협동학교’ 교사로 사랑채를 내줬다. 사랑채 앞에는 바위 하나가 서 있다. 신학문을 반대한 척사파 의병이 난입해 교사와 학생을 살해한 자리다. /박종인

의병들의 난입과 살해된 교사들

1934년 경북경찰부가 작성한 ‘고등경찰요사’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참으로 우려해야 할 일은 현재 (독립) 운동에 종사하고 있는 자보다 장래 사회 중견이 돼야 할 학생들이 거침없이 달려가 운동에 투신하거나 감화, 선동을 받고 있는 추세다.’(경북경찰부, ‘고등경찰요사’(1934), 류시중 등 역, 선인, 2009, p27)

이게 이들 혁신유림들이 만든 미래였다. 신교육은 어리고 젊은 개개 조선인을 각성시키는 작업이었다. 그 밝은 미래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1910년 7월 18일 오후 3시 폭도 18명이 협동학교에 소총과 피스톨, 칼을 들고 난입했다. 3명이 망을 보는 사이 이들은 교사 안상덕(32)과 김기수(24)를 죽이고 도주했다. 안상덕은 폐에 소총 관통상으로 즉사했다. 김기수 또한 총알이 폐를 관통하고 온몸에 칼을 난자당해 죽었다. 학생 이종화(29)도 죽었다. 폭도들은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의병(義兵)이다!”

단발을 하고 신학문을 학습하는 자들을, 척사파 의병들이 처단한 것이다. 단발을 하지 않은 학생은 무사했다. 전국에서 이들을 성토했고(1910년 7월 23일 황성신문 ‘吊協東學校·조협동학교’ 등) 평양 숭실중 출신 김하정과 서북협성학교 출신 김철훈이 후임 교사를 자원했다. 이들은 충주에서 거병한 예천 최성천 의병대로 밝혀졌다. 체포된 의병장 최성천은 1910년 11월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돼 그해 12월 처형됐다. 총독부 치하 진행된 이 재판 판결문에는 협동학교 난입과 교사 살인죄는 없었다.(국가기록원 ‘최성천 판결문’)

그래서 그때 교사들이 흘린 피가 바위까지 흘렀고, 사랑채 앞에 지금도 앉아 있는 그 바위에 귀신이 나온다는 것이다. 어이없이 피를 흘리며 죽은 선생들과 학생 혼령이 그 피가 뿌려진 바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김대락 종증손 김시중은 “어릴 때 바위 옆에 가기도 무서웠다”고 했다.

코앞 세상도 알 수 없는 엄혹하고 혼란하고 엉망진창인 시대였다. 세상은 그러했다. 어떤 이들은 새 세상을 위해 구법을 버리고 시대정신을 좇았고 어떤 이는 옛 세상을 지키려 그들을 죽였던 그 시대. 이제 앞으로 이들 혁신유림들이 망국 후 한 일들을 알아보기로 하자.<’불꽃처럼 살아간 혁신유림②'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