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2020년 세밑에 가본화성 남양만
경기도 화성 궁평리와 매향리 사이에 있는 바다를 남양만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굉장히 넓었는데 세월에 걸친 간척사업 끝에 상당 부분 땅으로 변했다. 그래서 남양만에 있던 가장 큰 포구 마산포는 뭍이 되었다. 마산포 앞 어섬[어도·魚島] 또한 언덕으로 변했고, 어도마을 앞에는 어도 버스 종점 이정표가 서 있다. 땅이 채 되지 못한 물은 화성호와 시화호라고 한다. 땅으로 변한 바다, 남양만 위로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이야기.
[242] 2020년 세밑에 가본 화성 남양만
흥선대원군 납치되던 날
임오군란 와중인 1882년 7월 고종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청군에 의해 끌려갔다. 그를 태운 청 북양함대 군함이 출발한 곳은 남양만 마산포였다. 혐의는 ‘난(亂)의 괴수’였다.(‘흥선대원군 사료휘편’ 4권 ‘대원군 체진 비망록’, 현암사, 2005) 마산포 주민 최만진(66)은 이렇게 추억한다. “대원군이 우리 할아버지 집에 하루를 묵고 갔다”고. 마산포에는 다 쓰러져가는 집이 한 채 있는데 경주최씨 종택이다. “진(陣)터에 어르신을 재울 수 없어서 우리 집에 모신 걸로 안다.” 청나라 참모 마건충이 기록한 ‘동행삼록’에는 마산포 숙박 여부가 기록돼 있지 않으니, 거인의 발자국은 옛 사람 기억 속에나 남았는지도 모른다.
대원군을 태운 배는 청나라 북양함대 소속 1258톤짜리 등영주(登瀛洲)호였다. 그 군함이 정박할 정도로 마산포는 큰 항구였다. 갓 개항한 제물포와 달리 삼국시대부터 대륙과 교역하던 무역항이었다. 그런데 지금 마산포는 작은 배 한 척 드나들지 못하는, 땅이다.
황금을 캐던 마산포 그리고 어섬
이종천(69)은 어섬 토박이다. 어섬은 말 그대로 물고기가 널린 섬이다. 마산포와 어섬 사이에 바다가 있었다. 물 빠진 갯벌에는 조개와 굴이, 물이 든 그 바다에는 물고기가 널린 바다였다. 파시(波市)가 열리면 남양만을 에워싼 온 바다 섬에서 배들이 몰려와 부두를 메웠다.
장관이었다, 라고 이종천이 말했다. “인근 사강에서 장이 열리면 우시장에 가는 소들이 선착장에 우글거렸고, 소몰이꾼들도 그만큼 많았다. 어섬은 정말 부자였는데….”
‘였는데’라는 말꼬리에 아쉬움이 진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파시가 문을 닫고 밤이 되면 부두에서는 화투판이 벌어졌다. 판돈을 잃은 사람은 담배 한 대 꼬나물고서 갯벌로 갔다. 그물을 거두면 물고기가, 갯벌에 호미를 집어넣으면 조개가 튀어나왔다. 아이들 교육비도 바다에서 나왔고, 그 아이들은 장성하여 모두가 잘살았다. 잃은 판돈까지 바다에서 회수하던, 그 시절에 대한 미련이 말꼬리에 묻어 있다.
그 바다가 지금 사라졌다. 남양반도 북쪽에는 시화방조제가, 남쪽 남양만에는 화옹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바다가 땅으로 변한 것이다. 부두를 채웠던 배들도 사라졌다. 배들이 떠나왔던 터미섬과 선감도와 불도와 탄도와 작은딱섬과 쌀섬과 외지섬과 쪽박섬과 할미섬과 형도와 우음도도 사라지고 산이라 부르기 민망한 언덕과 야산으로 변했다. 주민들이 애써 만들었던 어섬과 마산포 사이 세월교 개미다리는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뀌었고, 그 끝에 어섬 버스 종점 이정표가 서 있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했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완전히 거꾸로 된 엄청난 일이 남양만에서 벌어졌다.
사라진 섬, 농섬
남양만 남쪽 매향리 앞바다에서 농섬이 사라진 이유는 많이 다르다. 매향리와 궁평항을 잇는 화옹방조제로 남양만은 화성호로 변했다. 숲이 우거졌다고 ‘짙을 농(濃)’ 자 농섬은, 방조제 바깥에 있었는데도 지금 없다. 정확하게는, 밑동만 남았다.
6·25전쟁이 한창인 1951년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미 공군은 이곳 매향리를 폭격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훈련장 이름은 쿠니 사격장(Kooni Range)이다. ‘쿠니’는 매향리 옛 이름 ‘고온리’에서 따왔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낯선 외국에서 온 전사들이 쿠니 레인지에서 폭격을 훈련했다. 토착 주민은 물론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까지, 조개와 굴을 주우며 살던 사람들에게는 희생이 강요됐다.
전투기들은 하루에 수백 번씩 마을 상공을 선회하며 대기하다가 순서에 맞춰 기총사격과 포탄 투하 훈련을 했다. 기총사격은 마을 앞 논과 밭, 폭격은 앞바다 농섬과 윗섬과 구비섬이 타깃이었다. 50년 세월 사이 구비섬은 완전히 사라졌고 윗섬과 농섬은 뼈만 남았다.
그 마을에 전만규(64)가 살았다. 그가 말했다. “아기를 낳을 여자들에게는 신생아 귀를 막을 탈지면을 선물했다. 5일장이 서면 사람들은 괘종시계를 들고 장터에 갔다. 벽에 건 시계들이 다 떨어져서 고장 나서.” 주민들은 난폭해졌고, 강력 범죄가 잇달았고, 자살도 잇달았다. 오폭과 불발탄 사고로 많은 이가 죽었다. 견디지 못한 전만규가 중동으로 돈 벌러 갔다가 돌아와 보니 아버지도 목숨을 버린 것이다. 1980년이다.
1988년 민주화 열기가 폭발하면서 매향리 주민들도 생존권 투쟁을 시작했다. 반미(反美) 운동권도 가세했지만, 주민에게는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2000년 미군 전투기가 추락하고 한미군사협정 개정이 이슈가 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매향리 문제를 ‘생존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5년 마침내 쿠니 사격장은 폐쇄됐다. 사격장은 군산 앞바다 무인도 직도로 옮겨갔다. 미군은 ‘이로써 한반도에 A클래스 사격장은 전무하다’고 미 의회에 보고했다.(미 국방부 ‘유지 가능한 사격장 의회 보고서’, 2010, p230)
사격장 부지는 생태공원으로 변신했다. 절기(節氣) 대신 훈련 여부를 알리는 미군 황색 깃발을 보고 밭과 갯벌에 들어갈 수 있었던 매향리 농부와 어부들은 절기를 되찾았다. 다 부서진 농섬에는 풀씨들이 날아오고 새들이 날아왔다. 사격장에 있던 미군 부대 건물들은 경기도 우수건축자산 1호로 등록됐다. 미군이 함께 만들었던 매향리교회 건물은 예술가들 스튜디오로 변했다. 필요했으되 서글프고 아팠던 옛 기억이 역사로 남았다. 바다에 삶이 돌아오는 중이다.
한때 죽었던, 부활한 호수들
젊은 매향리 사내 전만규가 탈출구로 삼았던 중동은 1995년 여름 시화호를 ‘단 한 마리, 단 한 포기의 생명체도 발견되지 않는’ 4000만평짜리 무생물대(無生物帶)로 만들어버렸다. 1987년 정부가 중동 건설 특수 소멸과 함께 남아도는 중장비와 인력으로 대규모 간척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경기도 시흥 오이도와 화성 대부도 사이를 가로막는 방조제 공사는 1994년 끝났다. 공업단지 부지와 농경지를 확보하겠다는 계획은 엉터리임이 공사 도중에 드러났다. 나갈 길 막힌 하천 물은 썩었고 갯벌도 썩었고 땅도 썩어버렸다.
그 꼴을 최종인(65)이 보았다. 누구는 그를 개발 방해자라 불렀고 누구는 그를 시화호 지킴이라 불렀다. 시화호 옆 안산에 살던 최종인은 틈만 나면 사진과 글로 실상을 고발했다. 결국 1997년 4월 정부는 방조제 통문을 열어 바닷물을 유입시켰다. 전문가들이 30년 걸린다고 봤던 생태계 부활은, 최종인 예언대로, 10년 만에 이뤄졌다. 물고기와 조개는 물론 황새와 고라니와 삵이 갈대밭에 숨어들었다.
반세기도 되지 않는 시간에 이만큼 격변한 바다와 땅도 보기 쉽지 않을 터이다. 남양만을 막아 만든 화성호는 시화호 전철을 밟지 않았다. 통문을 수시로 열어 바다와 소통한 덕에 화성호 또한 새들 천지가 된 것이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도요새 무리들은 이 화성호를 휴게소처럼 이용하고 호주로 날아간다. 화성호 옆 광활한 땅은 지금 군용 공항이 노리는 중이라 언제 또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를 일이지만.
해가 바뀌는 길목에 그 남양만으로 잠시 틈입했다. 140년 전 중국으로 끌려가던 한 사내의 뒷모습, 담배 피우며 갯벌로 나가던 남정네의 등짝, 영문도 모르게 난폭해져버린 자신을 혐오하며 중동으로 떠났던 생존 투쟁가의 고함소리와 수평선 위로 간신히 존재하는 섬나라의 파편까지, 남양만에 강림한 태양빛은 고루 비췄다. ‘인류가 일단 정착하면 그 땅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마이클 테너슨, ‘인간 이후’, 쌤앤파커스, 2017) 내년에는 그런 아수라장이 벌어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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