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⑮ 권력을 탐한 지도자, 고종
“일찍이 구만리를 돌아다녀 보고 위아래 4000년 역사를 보았지만 한국 황제와 같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구한말 조선에서 활동한 사업가 겸 의사 겸 외교관 호러스 알렌이다. 칭찬인가, 조롱인가. 그 앞 문장에 답이 있다. “한국 국민은 가련하다(韓民可憐).”(황현, ‘매천야록’ 4권 1905년)
16세기 코페르니쿠스가 잉태한 과학 혁명과 18세기 미국 독립 혁명과 19세기 서구 산업혁명의 혜택을 흠뻑 받은 이 미국 지식인이 "처음 봤다"며 탄식한 인격체는, 조선 26대 군주 고종이다. 서기 1543년 지동설과 철포(鐵砲)와 백운동서원에서 출발한 우리네 시간 여행 종착지다.
맹활약한 진령군
갑신정변에서 살아 돌아온 고종 부부는 무당에 기댔다. 임오군란 때 왕비 민씨 눈에 든 장호원 무당 박창렬이다. 근대화의 시대, 조선 왕과 왕비는 주술에 기댄 것이다. 무당은 진령군이라는 군호까지 받고 창덕궁에 함께 살다가 사당을 챙겨 나갔다. 노론 거두 우암 송시열 집터에 지은 사당 이름은 북묘다. 진령군은 수양아들(내연남이라는 말도 있다) 이유인과 함께 살며 국정을 농단했다. 고종 부부는 이들 말을 듣고 금강산 일만이천 봉에 봉봉이 쌀 한 섬씩 바치며 국태민안을 빌었다. 밤에 무당이 왕비와 왕에게 한 말은 다음 날 어명으로 내려오곤 했다. 1894년 전 형조참의 지석영은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의 살점을 사람들이 씹어 먹으려 한다"고 상소했다. 진령군은 갑오경장 때 사형을 선고받고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조선일보 2017년 8월 10일자 '땅의 역사' 참조)
개화파의 절멸, 멸종된 인재
고종은 아내 민씨 일족에 기대 국정을 이어갔다.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이 물세를 받아먹다가 농민들에게 혼쭐이 났다. 조정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가 농민들을 위협하다가 혁명으로 번졌다.
문란한 삼정을 수습하기는커녕, 조선 정부는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사를 청했다. 아이디어는 고종이 냈고(1893년 5월 10일 '고종실록') 실행에 옮긴 자는 병조판서 민영준이었다. 민영준은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원세개에게 군사를 청했다.('갑오실기' 양력 6월 4일) 이후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서 전쟁을 벌였다. 청이 퇴각하고 일본이 이겼다.
1895년 10월 왕비 민씨가 일본인에게 시해됐다. 친일 개혁 정부가 들어섰다. 친일이었으나, 매국은 아닌 개혁 정권이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했다. 고종이 내린 첫 명령은 "역적들을 다 죽여라"였다. 내각 총리 김홍집과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거리에서 맞아 죽었다. 갑신정변 때 처단된 급진개혁파에 이어 온건개화파들이 아관파천 기간 모두 척살됐다. 이로써 조선에 남은 개화파들은 절멸됐다. 그리고 1897년 고종이 환궁하고 그해 10월 대한제국이 선포됐다.
압살당한 마지막 기회
1896년 서재필이 망명지 미국에서 귀국했다. 미국 국적을 가진 계몽주의자로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를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無知沒覺) 때문"(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1935년)이라고 했던 그였다.
대중은 왜 무지몰각했는가. 1884년. 서점 한 군데도 없고 정부가 펴내는 언문 책이라곤 삼강오륜 같은 유교 교리서만 있던 때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후 수신사들 보고서는 비단 장정본으로 만들어 곧바로 왕실 도서관으로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개화를 읽을 수 없었고, 대중에게 개화는 악(惡)이었다.
일본에서는 개화파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1866) 초판이 15만 부가 팔렸고 '학문을 권함'(1872)은 해적판을 포함해 300만 부가 팔렸다.(마루야마 마사오 등, '번역과 일본의 근대') 모두 한문이 아닌 일본어였다. 대중이 개화를 알았기에 일본 근대화는 가능했다. 이제 조선도 혁명의 때가 도래한 것이다.
1896년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만들었고, 무악재에 있던 청나라 사신 영접용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이를 위해 만든 단체가 독립협회였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서고 이듬해 3월 독립협회는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어쩌면 그때가 조선에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백정까지 참가한 만민공동회는 연일 자발적으로 열렸다. 한글 신문과 토론을 통해 대중은 개화가 악이 아님을 깨달았다. 세상은 바야흐로 "몇 명의 박영효, 몇 명의 서재필이 있는지 모를 만큼(不知幾泳孝幾載弼)" 각성을 하고 있었다.(1898년 11월 23일 '승정원일기') 가장 큰 주장은 의회인 중추원 설립과 자유 민권이었다.
1898년 10월 28일 일부 대신이 참가한 관민공동회가 열렸다. 그런데 그날 '입헌군주정'이 튀어나온 것이다. 헌법으로 황권을 제한하자는 논의에 고종과 수구 세력이 즉각 행동했다. 군부대신 민병석과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자금 2000원을 들여 독립협회 파괴를 선동했고(1898년 12월 24일 '고종실록') 그해 12월 25일 독립협회는 폭력적으로 해산됐다. 만3년이 못 되는 개혁의 기회는 사라졌다. 순식간에 세상은 '보부상 무리와 최악의 패거리가 구성한 반(反)개혁적 정부'가 장악했다.(1899년 1월 23일 '윤치호일기')
황제를 위해 급조된 헌법
고종은 신속하게 황제권 강화 작업에 돌입했다. 1899년 4월 갑오경장 때 폐지된 연좌제 부활을 시도했다. 국내는 물론 일본으로 망명 중인 개화파 국사범을 멸족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이는 6월 주재 외국 공사들의 일치된 반대로 무산됐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13권, 기밀본성왕 1899년 6월 15일)
6월 23일 고종은 제국 법률 제정 작업을 명했다. 7월 2일 설치된 '법규교정소'는 8월 17일 첫 법령을 내놨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헌법이다. 국제 1조는 '자주독립'을 규정했다. 그리고 2조부터 끝항 8조까지는 황제에 관한 조항이다. '대한제국은 전제정치다' '대황제는 무한 군권 향유' '신민은 황제 군권 침손 금지' '황제의 육해군 통솔, 계엄권' '황제의 법률 제정, 집행권' '황제의 행정부 관할권'에서 '황제의 조약 체결 및 선전포고권'까지 몽땅 황제의 권리였다. 고종이 그리도 바라 마지않던 절대 전제권이, '단 한 달 보름 만에' 법적으로 확보된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갑부 황제
6월 22일 고종은 군부(軍府)와 별도로 황제 직속 군사 조직인 원수부를 창설했다. 황제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군사, 경찰을 부릴 수 있는 장치였다. 원수부 건물은 황궁인 경운궁 대한문 옆에 설치됐다. 각 부서장인 총장은 의정부 대신보다 위였다. 고종은 원수부와 군부에 해마다 예산의 40%를 투입해 군을 육성했다. 그 군이 담당한 업무는 황궁 경비와 활빈당 척결과 소요 진압이었다. 1899년부터 1904년까지 6년 동안 군부대신은 25명이 바뀌었다. 평균 재임 기간은 87.6일이었다.(장영숙, '고종의 정권 운영과 민씨척족의 정치적 역할') 원수부 각 총장도 고종 마음대로 수시로 교체됐다.
황실 재정을 담당하는 내장원 권한도 대폭 확대됐다. 홍삼, 광산 사업 수익은 물론 동학혁명의 원인이던 각종 잡세를 부활시켜 내장원이 거둬들였다. 관세까지 탁지부에서 빼내 황제 직속으로 만들려던 시도는 당시 세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이 반발해 실패했다. 돈을 만드는 전환국 또한 내장원 소속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황제는 내장원을 통해 물고기, 소금, 선박, 인삼, 땔감, 풀, 갈대, 소나무, 밤, 대나무는 물론 완도 우뭇가사리와 서천 연어와 동해안 함경북도 염전까지 세금을 거두게 되었고 팔도 광산에서 나오는 돈은 대부분 황제 차지가 되었다.(이윤상, '대한제국기 황제 주도의 재정 운영') 내장원경 이용익은 1899년 이래 1904년까지 삼정감독(홍삼), 광무감독(광산)을 겸직했다. 황실을 견제해야 할 탁지부 협판(차관급)도 겸직했다.
1899년 10만1431냥이던 내장원 수입은 1901년 158만606냥으로, 1904년 3004만2433냥으로 300배 올랐다. 지출 가운데 황제 고종이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내입금 또한 2만5847냥(1899년)에서 1030만9631냥(1904년)으로 400배 올랐다. 1902년 전환국에서 찍어낸 백동화는 280만원으로, 이 가운데 150만원이 황실 금고로 입고됐다. 황실 업무비 소관 부서인 궁내부에도 40만원이 입고됐다.('고종시대사' 5집, 1902년 12월 31일) 정작 나라 예산을 다루는 탁지부는 군인과 경찰에 줄 월급이 없어서 전환국에서 거듭 돈을 빌려야 했다.(1903년 1월 6일 등 '황성신문')
돈 들여 키운 군사는 황궁 수비와 치안에 투입되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짠 세금은 황실 주머니로 들어갔다. 갑신년과 병신년에 죽여버린 개혁파 인재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황제 눈에 든 근왕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서로 싸우며 '주식회사 대한제국'을 경영했다. 전제군주 황제는 모든 것을 다 소유했다.
1904년 의회가 아니라 의정부 자문기관으로 전락한 중추원 의관 안종덕이 "폐하의 마음에 신의가 부족해 걱정"이라며 "썩어빠진 내장원과 원수부를 없애라"고 상소했다.(1904년 7월 15일 '고종실록') 열흘 뒤 봉상사 부제조 송규헌이 상소했다. "간신 10명이 조정 대신을 돌아가며 하고 있다." 간신 중에는 동학혁명 당시 안핵사 이용태(내부대신)도 있었고 무당 진령군에 빌붙어 권세를 누리던 이유인(궁내부 특진관)도 있었다. 고종은 "옳지만 시의(時宜)도 생각해야 한다"고 답했다. 상황이 상황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아주 옹졸한 멸망
그래, 부패했다. 황제권 강화를 염원했다. 좋다. 국정은 제대로 했는가. 1887년 8월부터 1905년 12월까지 18년 4개월 동안 일본 주재 조선 공사관에 부임한 공사는 모두 8명이다. 첫 공사는 부패의 화신이자 외교에 무지한 민영준이었다. 이들이 현지에 재임했던 기간은 6년 9개월로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한철호, '한국근대 주일한국공사 파견과 활동') 임명되지 않거나 임명됐어도 부임하지 않은 공사도 있었다.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 중인 일본 정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이니, 이게 나라인가. 국가 존망을 걱정하는 지도자인가. 절대 아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1905년 11월 17일 경운궁 중명전에서 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전날 밤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에게 고종이 말했다. "의정부에 의견을 물어야 한다." 이토가 말했다. "조선은 전제군주정이 아닌가. 폐하가 결정하면 그게 법이다." 전제군주 고종은 말문이 막혔다.
이토가 물러나고 전제군주에게 대신들이 몰려왔다. 머뭇대는 고종에게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말했다.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손상 없도록 한다'는 내용이 없으니 넣도록 하자." 고종이 말했다. "참으로 좋다." 대신들이 일제히 "하지만 의당 조약은 '불가(不可)'라는 두 글자로 물리치겠다"고 했다. 대답은 뜻밖이었다. "비록 그러하나 방금 전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모양 좋게 조처하라."(1905년 12월 16일 '고종실록') 조약은 황실 존엄 유지 조항을 넣고 통과됐다.
12월 3일 이근명(이 또한 친일파다) 등 원로들이 상소했다. "강토와 신민은 폐하가 창조한 게 아니라 물려받은 국가다. 폐하가 먼저 죽어 사죄하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1905년 12월 6일 '시국에 관한 건')
2년 뒤 1907년 7월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낸 사실이 공개됐다. 7월 4일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말했다. "일본에 저항하려면 은밀히 하지 말고 부디 대놓고 하시라. 우리가 적수가 돼 드리겠다."(구즈우 요시히사, '日韓合邦秘史·일한합방비사', 1926년) 조롱이었다. 일본에 공공연하게 맞설 돈도 군사도 인재도 없는 황제에 대한 조롱이었다.
성리학 서원과 철포(鐵砲)를 선택했던 서기 1543년, 그 굴레를 던질 기회가 여럿 있었지만 고종은 기회 대신 권력을 택했다. 갈비뼈 몇 개 부러지고 근대화의 충격에서 회복할 수 있었던 조선 왕국은 옹졸하게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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