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사자성어 말잔치
자고로 문자 가려 써야 한다. 상황 파악 못 하고 교양을 과시하려다 되레 수준을 의심받는다. 조선 후기 설화집 고금소총(古今笑叢)에 나오는 ‘문자 쓰다 장인 잃은 사위’ 이야기는 그 오랜 증거다. 밤중에 호랑이가 나타나 장인을 물고 갔는데, 얼른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하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글깨나 읽은 사위는 “원산맹호(遠山猛虎) 래오처가(來吾妻家)…” 문자 늘어놓으며 유식한 티 내느라 바쁘고, 그사이 장인은 호랑이 밥이 된다.
교수신문은 20년째 연말마다 당해의 세태를 대변하는 사자성어를 선정해 내놓고 있다. 전국 대학교수 880명이 투표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묘서동처(猫鼠同處)다. 중국 당나라 역사서에 나온 말로, 고양이와 쥐가 한데 있다는 뜻이다. 관리와 도둑이 한패이니 나라 꼴을 알 법하다. 2위로 꼽힌 사자성어는 인곤마핍(人困馬乏)이었다. 사람과 말 모두 지쳐 피곤하다는 의미라 한다. 역시 배우신 분들답게 모두 낯선 어휘였다. 서당 아랫목에 앉아 근엄히 훈계하듯 늘어놓는 훈장님 가라사대가 솔직히 마뜩잖다.
사자성어는 재치를 함축하는 매력적인 화법이다. 그러나 유구무언(有口無言)이어야 할 때, 아무리 근사한 단어를 동원한들 엄이도령(掩耳盜鈴)이다. 얼마 전 은수미 성남시장은 내년 시정 방향을 제시하는 사자성어로 승풍파랑(乘風破浪)을 발표했다.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쳐나간다는 원대한 포부를 담은 말이다. 취임 후 뇌물 공여 및 직권 남용 등의 범죄 혐의로 기소된 그에게 한 네티즌은 댓글로 사자성어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추천했다. 민심이 진정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고사성어와 달리 사자성어 중에는 끼워맞춘 말, 억지스러운 조어(造語)도 여럿이다. 이따금 예능 프로그램 ‘SNL 코리아’에서 청학동 댕기동자로 분장한 개그맨 유세윤이 꼴 보기 싫은 상대에게 “시발남아(時發男娥)”라고 외치던 모습이 떠오른다. 발음은 상욕이지만 “때 되면 떠날 줄 아는 아름다운 남자가 되자는 뜻”이라고 우기는 장면이었다. 지난여름 탄생한 희대의 영어 사자성어 ‘GSGG’가 그러했다. 언론중재법 상정이 무산되자 김승원 의원은 누가 봐도 욕설 초성인 이 단어로 페이스북에 불만을 드러냈고, 뒤늦게 “Government Serve…” 어쩌구의 줄인 말이라며 일수차천(一手遮天)하려다 여론의 십자포화(十字砲火)를 맞았다.
새해를 앞두고 희망과 각성의 사자성어가 전국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전라북도는 견인불발(堅忍不拔), 충청북도교육청은 교자채신(敎子採薪), 대전시의회는 집사광익(集思廣益) 등의 다짐을 내놨다. 권장해야 마땅한 좋은 말이다. 그러나 여러 획으로 이뤄진 그 말은 뜬구름처럼 멀리 있다. 오히려 갑남을녀들은 화천대유(火天大有), 민생파탄(民生破綻) 같은 현실의 언어를 더 선명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의 앞에서는 정작 묵묵부답(默默不答)이던 자들을 비웃을 것이다.
이제 지겨운 말잔치는 끝내자. 대한민국(大韓民國) 네 글자가 너무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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