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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통령이 태종이라면...가장 먼저 했을 일은?

bindol 2022. 5. 18. 04:06

지금 대통령이 태종이라면...가장 먼저 했을 일은?

[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입력 2022.05.17 03:00
 
 
그림=이철원

‘전환의 리더 태종에게 배울 점.’

지난주 열린 태종 서거 600주년 학술회의 대주제다. 태종이 산 시대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격변기였다. 대륙 중원에서는 원나라가 몰락하고 명나라가 새롭게 패권국으로 부상했으며, 국내에서도 새로운 나라 조선이 들어섰다. 태종 이방원이 14세기 말 걸출한 인물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두 차례나 중국을 오가며 거대한 시대 전환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스스로 조타수가 돼 조선이라는 배를 안전하게 목적지에 정착시키려는 비전과 방략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가장 높은 관심은 ‘태종이 지금 대한민국을 다스린다면 우선적으로 할 일’이라는 주제에 모아졌다. 발표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태종이 만약 대한민국호(號)를 이끈다면 가장 먼저 나라 기강을 바로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1418년 8월 취임사에서 태종의 정치를 한마디로 강거목장(綱擧目張)이라고 요약했다. 벼리[綱·강] 하나를 들면[擧·거] 그물코[目·목] 만 개가 모두 펼쳐지듯[張·장] 했다는 말이다. 태종이 가장 주목한 벼리, 즉 나라 기강은 공신과 외척 숙청이었다. 현대에서 공신과 외척이란 비공식 라인 또는 비선 실세를 상징한다. 이들이 득세할 조짐이 있다면 태종처럼 싹부터 잘라내야 국정에 기강이 선다. 즉위에 기여한 공신과 외척은 태종에게 보상과 지분을 요구했다. 자기 소유 사병(私兵)을 내놓으려 하지 않거나(이거이), 자기 가문을 위해 왕위 교체를 도모하기도(민무구 형제) 했다.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공신과 외척 제거를 하지 않고 성공한 지도자는 없었다. 공신과 외척으로 표현되는 측근이 권력을 잡을 때 최고 지도자는 두 가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하나는 신체적 위험이다. “코모두스 시해를 비롯해 로마 역사에서 모든 음모는 군주와 매우 친밀한 사람이 꾸몄다”는 게 마키아벨리의 통찰이다. 동중서(董仲舒)의 ‘춘추번로’를 보면 노나라 242년 역사에서 시해당한 군주가 32명이나 된다. 거의 8년 만에 한 번씩 군주가 시해됐다는 통계다.

공신과 외척을 제거하지 않은 군주가 직면해야 하는 더 큰 위험은 ‘정치적 시해’다. 태종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 ‘대학연의’에 따르면, 공신과 외척은 군주의 눈과 귀를 가리고 권한을 훔친다. 그러면 인재는 떠나고 인재가 떠난 자리에 아첨 잘하고 뇌물 바치는 자들이 모여든다. 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일은 시간문제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하는 물이다. 인재들은 승무원이고 열심히 노 젓는 사람’인데, 공신 외척은 군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배 바닥에 구멍을 뚫는다는 게 ‘대학연의’의 경고다.

 

태종이 가장 염두에 둔 역사 사례는 한고조 유방(劉邦)이 사망한 이후 벌어진 사태다. ‘태후 여씨는 고제(유방)의 당부를 저버리고 나라를 여씨들에게 넘기려 했다. 목숨을 걸고 간쟁한 왕릉과, 지혜롭게 대처한 진평·주발과 같은 충신이 없었다면 한나라는 끝장났을 것’이라는 ‘자치통감’의 기록처럼 공신과 외척은 나라를 망하게도 할 수 있는 세력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외척 공신의 위험은 도처에서 보인다. 고려 중기 예종과 인종의 장인인 ‘인주 이씨’ 이자겸부터, 조선 후기 순조의 장인 ‘안동 김씨’ 김조순, 효명세자의 장인 ‘풍양 조씨’ 조만영 등에 이르기까지 외척은 자기 가문을 위해 호시탐탐 국가를 이용해 먹으려 했다.

조선 중기 ‘파평 윤씨’ 문정왕후 수렴청정 20년(1545~1565)은 외척 정치가 얼마나 국가라는 배 바닥에 구멍을 심각하게 뚫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누이 문정왕후의 후원에 힘입은 권신(權臣) 윤원형은 이조와 병조의 5품 이하 인사 담당 부서에 자기 사람을 심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낭관(郎官)이라는 인사 실무자를 장악하자 낭관의 영향을 받는 중앙의 언론, 즉 대간(臺諫)이 통제되었고, 지방 수령 인사까지 좌우지할 수 있었다. “인사 담당자가 오직 재상(윤원형)이 있는 것만 알고 군부(君父·명종)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해서, 작금(昨今)의 정사가 모두 사사로운 요청[私請·사청]에 따라 이뤄진다”는 실록의 기록은 그런 정황을 보여준다(명종실록 8년 3월 4일). 매관매직의 필연적 결과는 백성 수탈이었다. 지방 수령들은 재상에게 바칠 뇌물을 마련하려고 힘없는 백성들만 찾아서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다. 명종 14년에서 17년까지 약 4년간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로 커진 임꺽정의 활약은 그러한 민생 파탄을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지금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신과 외척 정치가 발호할 수 있겠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에게 공신과 외척이 정치에 개입해 성공한 역사 사례가 있는지 되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