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고전 속 정치이야기] 문화통치(文化統治)

bindol 2022. 5. 19. 19:42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은을 멸망시킨 주는 봉건을 시행할 때 건국에 가장 공을 세운 주공단(周公旦)과 여상(呂尙)을 산동지역에 봉했다. 그러나 각자 통치기반을 구축하는 방법은 상반적이었다. 주공은 무왕이 죽은 후 섭정하느라고 봉지인 노(魯)를 아들인 백금(伯禽)에게 맡겼다. 백금은 아버지 대신 건국의 책임을 지고 곡부로 갔다가 3년이 지난 후 돌아와 보고했다. 주공은 아들에게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물었다. 백금이 대답했다. “노에 원래 있었던 풍습과 습관은 물론 예의와 제도도 바꾸느라고 늦었습니다.”

백금과 같은 시기에 봉지로 출발했던 태공망 여상은 제(齊)를 세운 후 5개월이 지나자 낙양으로 돌아와 경과를 보고했다. 주공이 어떻게 빨리 왔느냐고 물었다. 태공이 대답했다. “저는 예의를 간소화했습니다. 현지인들의 풍습과 습관을 되도록 지키려고 애를 썼지요.”

주공은 백금이 늦게 돌아온 이유를 알게 되자 이렇게 탄식했다. “아! 후세의 노의 자손들은 결국 제의 신하가 되겠구나! 정령은 간소해야 실행된다. 백성들과 통치자가 친하려면 정령이 평범하고 간편해야 한다.”

제로지역에는 중원에 못지않은 문화와 경제력을 갖춘 동이족이 거주했다. 주는 동이족을 굴복시키고 황하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가장 유능한 여상과 주공이 직접 통치하기로 했다. 제와 노는 동이족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해야 할 공동의 과제를 안았다. 그러나 두 나라의 건국전략은 완전히 달랐다. 그것이 이후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백금은 황하의 중상류에서 형성된 주문화를 태산의 남쪽에 억지로 옮기려고 했다. 예의와 풍속은 안정성과 전승을 유지하려는 강력한 보수성을 띤다. 백금은 이를 무시하고 ‘변(變)’과 ‘혁(革)’을 강제적으로 시도했다가 동이족과 격심한 충돌을 일으켰다. 여상은 예의와 풍속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동이족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도록 권장하여 단시간에 안정을 이룩했다. 그것이 제의 정치문화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제환공을 최초의 패자로 만든 관중(管仲)과 경공을 도와 제를 강력한 군사대국으로 만들었던 안영(晏嬰)은 전통 민속을 바탕으로 국가를 통치해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데 치중했다. 안영이 공자를 배척한 것은 유가의 번잡한 예의와 제도가 질박한 문화적 전통을 지닌 제의 실정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질적인 건국방침은 후대 양국의 발전과 흥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는 단기간에 원주민과 통치집단이 일체화돼 강대국으로 성장했지만, 노는 원주민과 끊임없는 마찰로 국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춘추 말기에 이미 3류 국가로 전락했다. 주공단은 제와 노의 건국전략이 지닌 강약점을 정확히 판단하고 양국의 미래를 예측했던 것이다. 한 닢의 낙엽이 지는 것을 보고 머지않아 가을이 올 것을 알고, 서리를 밟으며 머지않아 혹독한 겨울이 다가올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다. 주공은 여상의 탁월한 능력을 미리 경계했기 때문에 그에게 가장 멀고 강력한 이민족이 사는 산동성의 북동쪽을 봉지로 주고, 자신의 후예들에게 산동성 동남쪽을 맡겨 장차 닥칠지도 모르는 주왕실과 제의 충돌을 막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중앙정부의 섭정을 맡는 바람에 봉지에 대한 배려를 하지 못했으므로 결국은 염려가 사실로 드러나는 것을 지하에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상이 현지인들의 풍속과 문화를 중시한 것은 자신이 동이족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은왕조의 멸망이라는 공동의 과제를 해결한 후 자신에게 닥쳐올 정치적 위기를 예상하고 주공이 중앙정부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보내려고 하자 기꺼이 수락했다. 반발했더라면 통치 권력 강화를 위해 형제들마저 죽인 주공에게 제거됐을 것이다. 탁월한 전략가들의 머리싸움을 되새겨본다.

출처 : 천지일보(http://www.newscj.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