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과 애틀리가 웃을 것만 같다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윈스턴 처칠(보수당)과 클레멘트 애틀리(노동당)를 둘러싼 숱한 일화 중 대표적인 것이 '화장실 사건'(?)이다. 영국 의회 화장실에서 애틀리를 만난 처칠이 멀찌감치 떨어지면서 건넸다는 농(弄). "당신은 큰 것만 보면 다 국유화하려 하지 않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집권한 애틀리가 경제 복구를 위해 밀어붙인 기간산업 국유화가 이 유머의 배경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 연설에서 협치의 모델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처칠-애틀리 전시 연합 내각을 거론했다. 뜻은 알겠는데, 어쩐지 민망하다. 대내외 상황이 어렵고 할 일이 태산 같아 거대 야당의 협조가 절실한 건 알겠다. 그래도 '어디 갖다 댈 걸 대셔야지'하는 기분이다. 지금 목도하는 우리 정치판의 수준에 비하면 두 사람이 보여줬던 정치 품격은 가히 상상계 수준이기 때문이다.
처칠과 애틀리. 영국 보수당과 노동당을 대표했던 두 사람은 1940년부터 1955년까지 총리를 번갈아 맡으며 전쟁 수행과 전후 복구에 매진했다. 둘은 정적이었지만, 2차 대전 중에는 전시 내각을 구성해 협력했다. [중앙포토]
다변에다 불같은 성정의 처칠이 과묵하고 내성적인 애틀리를 일방적으로 '디스'하긴 했다. "양의 탈을 쓴 양" "겸손할 게 많아 겸손한 사람" 같은 농담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상대 인격에 대한 기본적 존경이 담겨 있다. 처칠은 공식 자리에서 애틀리를 "조용하지만 뜨거운 용기가 타오르는 신사이자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애틀리도 전시 내각을 이끄는 처칠에게 "우리 모두 당신 뒤에 있소, 윈스턴(All behind you, Winston)"이라며 지지했다. 1965년 처칠이 먼저 사망하자 애틀리는 가누기도 힘든 팔순의 몸으로 1월의 찬 바람 속 운구 행렬에 참여했다.
애틀리는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당내 친공산주의 세력을 누르고 온건 개혁의 키를 놓치지 않았다. 평화주의 성향이면서도 미·소에 치인 조국의 위상을 높이려 핵 개발을 주도했다. 처칠은 어떤가.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이라는 총리 취임 연설로 전쟁을 맞은 국민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강경파 초선 몇몇과 지지자들에게 휘둘려 합리적 판단력이 마비된 듯한 우리 민주당은 애틀리의 노동당처럼 될 수 있을까. 취임사에서 복고풍 자유를 35번 반복한 윤 대통령은 처칠처럼 감동적 커뮤니케이터가 될 수 있을까.
물론 품격이 정치의 전부는 아니다. 전쟁 경황 중에도 두 사람은 거래의 기술을 발휘했다. 줄 건 주고 챙길 건 챙겼다. 현대 복지국가의 이정표 격인 '베버리지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애틀리는 자신의 정치 노선인 복지 확대를 요구했고, 지친 국민을 달랠 필요가 있었던 처칠도 수용했다. 42년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노동부 차관인 윌리엄 H 베버리지를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 보험과 관련 서비스에 관한 위원회'가 그 결과다. 보고서가 나온 뒤 보수당 재무장관 킹슬리 우드가 재정 문제로 난색을 보였지만, 노동당은 끝내 보고서 공표를 관철했다. 이 보고서가 끌어올린 대중의 복지 열망은 45년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두 사람 간 화장실 유머의 씨앗은 이미 전시 내각 때 뿌려졌던 셈이다.
대통령제는 본질상 협치가 어려운 권력 체제다. 대통령의 적극적 의지가 있어도 될까 말까 한 게 협치다. 윤 대통령이 거국 내각이나 연정을 제안한 건 아니다. 그러나 제한된 수준의 협치라도 뭘 양보할지는 고민해야 한다. 거룩한 말만으로는 공포에 질린 맹수처럼 웅크린 거대 야당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윤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연금·노동·교육 개혁을 위해서라도 야당의 협조는 필요하다. 어쩔 수 없는 여소야대의 현실이다.
대통령이 국회에서 야당 지도부보다 더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의원 모두와 악수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여당 의원들과 5·18 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 것도 반가웠다. 하지만 이걸로 끝나서는 선거용 이벤트 소리만 듣는다. 중요한 것은 태도가 아니라 행동이다. 문재인식 '캠코더' 인사가 윤석열식 마이웨이 인사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이런 판에 민심마저 잃는다면 윤석열 정부는 임기 내내 참호전만 펼쳐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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