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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실향민 송해의 대한민국

bindol 2022. 6. 23. 04:01

[태평로] 실향민 송해의 대한민국

송해처럼 남쪽의 삶 택한 이들
‘고향 잃은 실향민’ 규정 부적절
가난 딛고 자유 번영에 기여
오늘의 한국 일군 개척자로 봐야

입력 2022.06.23 03:00
 
 
활짝 웃는 모습과 한쪽 손을 들며 ‘전국~’을 외치는 모습은 송해의 트레이드 마크다. 사진은 지난 2016년 KBS ‘전국노래자랑’ 세계대회편 녹화를 마친 뒤 송해의 모습. 미국, 브라질, 가나 등 전 세계에서 온 해외 동포가 그와 만났다. /조선일보 DB

이달 초 타계한 방송인 송해가 남긴 대담집을 읽다가 한 대목에서 눈길이 멎었다. ‘제가 1년에 반은 지방으로 다니는데 그 지방을 2년이나 3년 만에 다시 가면 달라지고 또 달라져 있어요.(중략) 한강 줄기를 보면 와, 우리 대한민국이 이렇게나 바뀌었나, 외국은 많이 안 가봤지만 마치 런던 어디인가 싶게 변했어요.’

송해는 1988년부터 35년간 전국노래자랑 MC로 전국을 누비며 발전을 거듭하는 나라를 지켜봤다. 그의 말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1953년 76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5000달러를 넘었다. 1인당 소득이 7년마다 두 배로 늘기를 거듭해 70년간 500배 증가했다. 명목국내총생산은 4만배로 뛰었다.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송해는 6·25가 나던 해 겨울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 국민으로 70년을 살았다. 그런 송해가 몇 해 전 실향민 덕수의 생애를 다룬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내 얘기”라며 눈물 흘렸다. 덕수는 흥남부두를 빠져나오다가 아버지 여동생과 헤어졌다. 송해도 비슷했다. 고향을 등지던 날,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부두에 나와 “몸조심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는 남녘의 삶은 신산했다. 막노동을 전전하다가 파독 광부가 된 덕수는 무너진 탄광에 깔려 이국 땅에서 죽을 뻔했고, 유랑극단에 들어간 청년 송해는 혹독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투신했다가 나무에 몸이 걸려 살아남았다.

영화 속 덕수는 생이별했던 여동생 막순을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에서 만났다. 송해는 금강산 관광 문이 열렸을 때 북한 땅을 다시 밟았지만 어머니와 누이를 만나지 못했다. “금강산 만물상을 보면서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면 바위에 얼굴이 나타난다”는 북한 안내원 말을 듣고 만물상을 향해 목놓아 울며 어머니를 외치다가 돌아왔다.

 

해방과 6·25 전후로 북한 주민 약 140만명이 송해처럼 고향을 등졌다. 부모와 형제, 고향을 평생 그리워하면서도 갈 수 없었기에 실향민이라 불렸다. 하지만 실향민은 수동적인 어휘다. 그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기로 결심한 이유와 그 후 삶의 궤적을 설명할 수 없다. 북한에 들어선 김씨 왕조를 거부했고 자유의 가치를 믿었으며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신념을 지닌 그들은 고향을 잃었다기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탈향(脫鄕)을 택한 개척자였다.

봉건적 신분질서를 거부한 근대적 기독교인들과 신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도 함께 왔다. 해주에서 음악학교를 다닌 송해도 그 시절 고학력 엘리트였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나라가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기꺼이 총 들어 전선에 나갔고 전후엔 경제를 일으켰다. 백선엽은 김일성이 북한을 장악하자 탈북해 우리 육군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갔다. 6·25가 터지자 전쟁 영웅으로 나라를 지켰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노인이 된 덕수는 안방에 걸린 아버지 사진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그사이 거실에선 아들 딸, 손자 손녀가 둘러앉아 웃음꽃을 피웠다. 덕수의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그들의 웃음도 없었을지 모른다.

송해는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다. 술 한잔 걸치면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로 시작하는 노래 ‘고향설’을 불렀다. 그가 별세하자 많은 국민이 “천국노래자랑 MC도 하시라”며 애도했다. 그가 사회를 보는 하늘 무대 방청석엔 전쟁으로 생이별한 부모와 누이, 남쪽에서 사고로 가슴에 묻었던 아들, 서너 해 전 먼저 간 아내도 있을 것이다. “좋은 나라 만드느라 애썼다”며 따뜻한 포옹으로 그를 맞이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