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태 코너

[이규태 코너] 歲暮 보시

bindol 2022. 11. 29. 16:30

[이규태 코너] 歲暮 보시

조선일보
입력 2001.12.28 19:52
 
 
 
 


화가 밀레의 대표작으로 '이삭줍기 '를 기억할 것이다. 가난해
보이는 세 농부(農婦)가 누추한 옷차림으로 이삭을 줍고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의 주제는 근검절약이 아니라 '구약성서 '에
있다. '곡식을 거둘 때 모조리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을 모아
갖지 말지어다 '라고 '레위기 '에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땅에 떨어진 이삭은 병든 홀아비, 의지할 곳 없는 노인, 그리고
과부·고아들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관행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사람을 위한 베풂의 문화는 꽤나 발달했었다.
중국사신 기록인 '고려도경 '에 보면 개성에서는 여름날 집집마다
물항아리를 묻어두고 행인에게 베푸는 시수보시(施水布施)를 했으며
한양 북촌의 마님들은 세모에 '원(院)나들이 '를 했는데 성밖
홍제원 ·퇴계원 ·이태원 등을 찾아가 이곳에 수용된 행려병자들에게
음식과 약을 베푸는 활인보시(活人布施)를 했다. 가난했던 산골에도
나름대로의 보시관습이 많았다.

행인들이 많이 넘어다니는 고갯마루에 짚신 삼아 걸어두면 행인들이
해진 짚신 갈아 신고 가곤 했던 것이다. 지금도 노숙자가 많지만
옛날에도 남대문 ·동대문 인근에는 팔도에서 올라온 노숙자가
우글우글했다. 그럼 조석으로 빈대떡을 수레에 싣고와서
'청계천변 천령현씨(川寧玄氏)빈자 보시오!'
'회동(會洞)동래정씨 빈자 보시오!'하고 외치며 빈대떡을
나누어주었다.

 

상여 나갈 때 메기는 향두가(香頭歌)에 보면 망자가 염라대왕 앞에
가 심판 받는 대목이 나오는데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보시(救難布施)하였는가. 과객 불러 먹여 재워
행인보시(行人布施)하였는가.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보시(越川布施)하였는가 '고ㅡ. 짐승에게까지 보시 범위를
넓혀 겨울새들을 위해 까치밥을 남겨두고 들과 산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고수레를 하여 산짐승과 굶주린 망자까지 배려했던 조상들이
었다.

세모의 자선냄비에 익명으로 거금을 넣는 이가 있어오더니 4년째
은평구 구산동 결핵환자촌에 집집마다 쌀 3포대씩 도합 600포대를
배달해준 익명의 인사가 있어 구산동 기온을 영상으로 올려놓고 있다.
그 뭣보다 한국인의 정신 속에 빈사하는 보시(布施)유전질을
찾아보았다는 데 의미부여를 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