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읽는 한시 198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밤에 앉아(夜坐)

[가슴으로 읽는 한시] 밤에 앉아(夜坐)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밤에 앉아(夜坐) 칠순이 바짝 다가와 마음은 조급한데 오막살이 신세로서 곤궁함을 견디네. 시든 풀로 허기 때우니 명마는 과거가 그립고 빈 숲에 살자 하니 학은 가을바람에 울적하네. 시름이 찾아오면 누룩 짜서 석 잔 들이켜고 병든 뒤에는 굴원의 "이소"를 한바탕 읊조린다. 백발이래도 나라 걱정은 놓지 못하노니 밤 깊어 사위어가는 등잔불이 붉은 마음 비추네. 七旬將滿意悤悤(칠순장만의총총) 身世蓬廬耐苦窮(신세봉려내고궁) 敗草驪飢懷往日(패초려기회왕일) 虛林鶴棲感秋風(허림학서감추풍) 愁來頓遜仍三酌(수래돈손잉삼작) 病後離騷又一通(병후이소우일통) 白首猶爲民國慮(백수유위민국려) 夜闌殘燭照心紅(야란잔촉조심홍) 순조 시대의 시인 묵소(默所) 심헌지(沈獻..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소나무

[가슴으로 읽는 한시] 소나무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소나무 솔방울 바람에 떨어져 우연히 집 모퉁이에 자라났네. 가지와 잎 하루하루 커가고 마당은 하루하루 비좁아졌네. 도끼 들고 그 밑을 두세 번 돌았어도 끝내 차마 찍어 없애지 못했네. 날을 택해 집을 뽑아 떠났더니 이웃들이 미친놈이라 손가락질했네. 雜詩 松子隨長風(송자수장풍) 偶然生屋角(우연생옥각) 柯葉日已長(가엽일이장) 庭宇日已窄(정우일이착) 持斧繞其下(지부요기하) 再三不忍斫(재삼불인작) 卜日拔宅去(복일발택거) 鄰里指狂客(린리지광객) 19세기 전기의 감산자(甘山子) 이황중(李黃中·1803~?)이 지었다. 그는 평생을 기인으로 살았다. 어느 날 솔방울 하나가 바람에 날려 집 모퉁이에 떨어졌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더니 싹이 트고 가지와 잎이 자랐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철원에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철원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철원에서 첫겨울 찾아오는 음력 10월 초 북쪽의 철원으로 거처 옮겼네. 우리 집은 북쪽이 넓게 펼쳐져 저 멀리로 궁예의 궁터 보이는데 성곽은 황량하게 숲을 이루고 옛 궁궐은 사람 없는 폐허 되었네. 슬픈 노래 부르며 검 어루만지고 강개한 기분 되어 책 덮어버리네. 鐵原 孟冬十月初(맹동십월초) 北遷鐵原居(북천철원거) 我家背北寬(아가배북관) 遙望弓王墟(요망궁왕허) 城郭爲荒林(성곽위황림) 古闕無人虛(고궐무인허) 悲歌撫我劍(비가무아검) 慷慨爲廢書(강개위폐서) 17세기 말엽의 소년 시인 택재(澤齋) 김창립(金昌立·1666~1683)이 13세에 지었다. 시를 잘 지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좌의정으로 재직하던 아버지 김수항(金壽恒)이 유배를 당해 전라도..

[가슴으로 읽는 한시] 겨울

[가슴으로 읽는 한시] 겨울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겨울 1년 내내 할 일이 끝도 없이 이어져 해가 가도 손을 털지 못하겠구나. 폭설에 무너질까 판자처마 걱정되고 바람 불면 삐걱대는 지게문 소리 싫어라. 새벽 서리 밟으며 산에 올라 나무하고 달 뜬 밤이면 지붕 이을 새끼를 꽈야지. 봄철이 시작되기 기다리지만 그 때라도 휘파람 불며 언덕에 오를라나. 歲事長相續(세사장상속) 終年未釋勞(종년미석로) 板簷愁雪壓(판첨수설압) 荊戶厭風號(형호염풍호) 霜曉伐巖斧(상효벌암부) 月宵升屋綯(월소승옥도) 佇看春事起(저간춘사기) 舒嘯便登皐(서소편등고)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1150~1209)가 겨울철 농가의 생활상을 읊었다. 말은 농한기라 하지만 한시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다. 한 해가 끝나가는 철인데도 ..

[가슴으로 읽는 한시] 눈

[가슴으로 읽는 한시] 눈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눈 밤도 아닌데 봉우리마다 달이 떴고 봄도 아닌데 나무마다 꽃이 피었네. 천지 사이에는 오로지 검은 점 하나 날 저물어 돌아가는 성 위의 까마귀 한 마리!\ 雪 不夜千峰月 (불야천봉월) 非春萬樹花 (비춘만수화) 乾坤一點黑 (건곤일점흑) 城上暮歸鴉 (성상모귀아) 인조 연간의 문신 만주(晩洲) 정창주(鄭昌胄·1608~1664)가 지었다. 놀랍게도 이 시는 일곱 살 때 지었다. 어느 겨울날 대설이 내려 천지가 눈에 덮이자 일곱 살 난 아이는 갑자기 시심이 일어났다. 온통 눈에 덮인 설경을 어떻게 묘사해야 좋을까? 밤에나 뜨는 달이 오늘은 모든 산에 밝게 떴고, 봄에나 피는 꽃이 오늘은 모든 나무에 활짝 폈다. 온 세상이 달빛처럼 하얗고, 꽃처럼 화려하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임은 하늘로

[가슴으로 읽는 한시] 임은 하늘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임은 하늘로 한 이불 덮다가 이별한 지도 잠깐 어느새 천년이 된 듯하다. 먼 하늘 떠가는 구름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대 다시 만나려고 오작교 기다릴까? 은하수 서편가 달은 배 같다. 悼亡 同床少別已千年(동상소별이천년) 極目歸雲倚遠天(극목귀운의원천) 後會何須烏鵲渡(후회하수오작도) 銀河西畔月如船(은하서반월여선)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 ~1805)이 1787년 겨울 아내를 잃고 썼다. 모두 20편을 썼는데 그중 2수만 남아 있다. 35년을 함께한 아내가 먼저 하늘로 떠났다. 겨우 며칠 지났을 뿐인데 마치 천년이 흘러간 듯 까마득하다. 먼 하늘을 떠가는 구름 한 조각은 마치 아내의 분신인 듯하여 하염없이 바라보며 멍하게 서 있다. 하..

[가슴으로 읽는 한시] 동지 후 서울에 들어와 자다

[가슴으로 읽는 한시] 동지 후 서울에 들어와 자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동지 후 서울에 들어와 자다 인생에서 모였다 흩어지기는 구름이나 안개 같은 것 다 제쳐 두고 서로 만나 한바탕 웃고 나면 그만이지. 나그네 되는 인연은 눈 오는 밤에 흔히 만들어지고 시를 읊는 자리는 매화 필 때에 차례가 오네. 집에 머물러 선정에 드니 절에 간 것과 한가지라 술을 얻고 실컷 마셔대 배 같은 술잔 엎어버리네. 지척에 두고 하염없이 꿈결인 양 떠오르는 사람 이런 때 보기 어려우니 사뭇 더 그리워지네. 至後入城宿版泉 人生聚散摠雲烟(인생취산총운연) 且可相逢一燦然(차가상봉일찬연) 作客因緣多雪夜(작객인연다설야) 吟詩次第到梅天(음시차제도매천) 在家禪定同蕭寺(재가선정동소사) 得酒貪餮廢玉船(득주탐철폐옥선) 只尺依依如夢境(지..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서울에 살다보니

[가슴으로 읽는 한시] 서울에 살다보니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서울에 살다보니 서울은 번화하기 짝이 없는 곳 그래도 지방 사람에겐 걸림돌 많네. 담장은 밝은 달빛 가로막았고 아침저녁 개 짖는 소리 시끄러워라. 시구를 찾다 보면 귀향을 꿈꾸고 조촐한 술상 내와도 함께할 사람 없네. 집 앞으로 아는 얼굴 숱하게 지나가도 내게는 오직 강변의 고향 생각뿐. 京國 京國繁華地(경국번화지) 還於遠客妨(환어원객방) 門墻蟾影限(문장섬영한) 昏曉犬聲揚(혼효견성양) 覓句成歸夢(멱구성귀몽) 無人對薄觴(무인대박상) 經過多識面(경과다식면) 惟我水雲鄕(유아수운향) 양평 사람 헌적(軒適) 여춘영(呂春永·1734~1812)이 서울로 집을 옮겨 살면서 시를 썼다. 서울은 그때도 누구나 가서 살고 싶은 번화한 도회지다. 그러나 타지..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새해를 맞아(新年得韻)

[가슴으로 읽는 한시] 새해를 맞아(新年得韻)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새해를 맞아(新年得韻) 새해 되어 기분 좀 풀려고 걸어온 길 찾았더니 바람 불고 구름 덮여 그늘질까 염려되네. 운명에 몸 맡기면 나쁜 상황 다 걷히고 사랑 품고 남 대하면 모두가 친구 되지. 위기에 돕겠다는 남의 손을 어찌 믿으랴? 재앙 준 것 뉘우치는 하늘을 곧 보리라. 큰 강에 뿌리는 찬비에 마음 서운하니 그대 보내며 적셔오는 눈물 어쩌면 좋을까? 春生料理舊岐尋(춘생요리구기심) 只恐風雲翳作陰(지공풍운예작음) 隨命置身無惡境(수명치신무악경) 懷仁接物摠知音(회인접물총지음) 扶傾曷恃時人手(부경갈시시인수) 悔禍將看上帝心(회화장간상제심) 最是長江寒雨裏(최시장강한우리) 不堪送子淚沾襟(불감송자누첨금)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객지에서

[가슴으로 읽는 한시] 객지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객지에서(客懷) 이 몸은 동서쪽 그 어디로 가야 하나? 가는 곳 정처 없어 쑥대마냥 흘러가네. 떠돌다가 친구 만나 한 집에서 잠을 자며 난리 겪는 타향에서 새해를 맞이하네. 눈 덮인 산 훨훨 날아 기러기는 돌아가는데 새벽녘 바람 타고 나팔소리 들려오네. 서글퍼라, 낯선 땅을 구름처럼 가는 신세 돌아나는 봄풀에는 그리움만 하염없네. 此身那復計西東(차신나부계서동) 到處悠悠逐轉蓬(도처유유축전봉) 同舍故人流落後(동사고인유락후) 異鄕新歲亂離中(이향신세난리중) 歸鴻影度千峰雪(귀홍영도천봉설) 殘角聲飛五夜風(잔각성비오야풍) 惆悵水雲關外路(추창수운관외로) 漸看芳草思無窮(점간방초사무궁) 조선 중기의 시인 손곡(蓀谷) 이달(李達·1539~1612)이 임진왜란 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