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874

[분수대] 사람에 대한 충성[출처: 중앙일보]

박진석 사회에디터 “가문의 영광인 중책을 맡겨주신 대통령님의 태산 같은 성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통령님께 목숨을 바칠 각오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2001년 5월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기자실이 뒤집어졌다. 팩스로 도착한 안동수 법무부 장관 ‘취임사’에 엄청난 문구들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안 장관 사무실 직원이 김대중 대통령 측에 보내야 할 문서를 잘못 보낸 것이다. 왕조 시대를 방불케 하는 시대착오적 충성 서약서는 그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 잡으면서 두고두고 재인용되고 있다. 이명박 정권 시절의 영포라인도 가관이었다. 이들은 민간인 불법사찰로 논란이 됐던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업무추진 지휘체계’ 문건에 자신들을 ‘VIP께 절대 충성하는 친위조직’ ‘VIP에게 일심(一心)으로 충성할 ..

분수대 2021.01.30

[분수대] 당신이 검사냐[출처: 중앙일보]

박진석 사회에디터 “당신도 검사요?” 2000년 서울지검의 한 특수부장실, 국가정보원 고위 간부의 금품수수 의혹을 수사하던 검사가 부장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부장은 정권과의 인연 덕택에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수사 기록을 빼앗는 방법으로 정권에 보은했다. 검사는 “수사를 계속할 수 있게 기록을 돌려달라”고 읍소하다 지쳐 “당신이 검사냐”고 대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그 검사는 다음 인사 때 한직으로 쫓겨났다. 얼마 전 한 상갓집에서 그 장면이 재연됐다. 본질은 동일했다. 양석조 검사가 상관인 심재철 대검 반부패강력부장에게 “당신이 검사냐”고 대든 건 심 부장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형사처벌(기소) 무마 시도를 했기 때문이었다. 기소됐기에 망정이지 불기소 처분됐다면 단숨에 ‘게이..

분수대 2021.01.30

[분수대] 진검승부[출처: 중앙일보]

박진석 사회에디터 허공을 가른 두 개의 칼이 무사들의 어깨에 내리꽂혔다. 다행히 목검이라 끔찍한 결과는 없었지만, 속도가 워낙 빨라 승자를 가리기 어려웠다. 한쪽이 외쳤다. “내가 이겼지?” 상대편이 냉담하게 받아쳤다. “아니, 졌어. 진검이었으면 너는 죽었을 거야.” 격분한 무사는 “그럼 진짜 칼로 승부를 가려보자”며 칼을 뽑았다. 적수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지만 먹히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칼을 뺐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을 깨고 두 칼이 춤을 춘 순간, 비명이 솟구쳤다. 먼저 도발했던 무사는 피를 뿜으면서 천천히 옆으로 쓰러졌다.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대표작 ‘7인의 사무라이’ (1954) 속 장면이다. 이 시퀀스 속에는 흔히 말하는 ‘진검승부’의 냉혹함이 제대로 담겨 ..

분수대 2021.01.30

[분수대] 청백전[출처: 중앙일보]

장혜수 스포츠팀장 당구에는 일본어 용어가 많다. 내기 당구, 특히 두 명씩 두 팀으로 칠 때 흔히 ‘겐페이’라고 한다. 겐페이의 ‘겐’은 ‘근원 원’(源), ‘헤이’는 ‘평평할 평’(平)이다(‘겐’ 뒤의 ‘헤이’는 ‘페이’로 발음한다). 헤이안(平安) 시대 말기인 1180년, 일본의 양대 무사 일족인 겐지(源氏)와 헤이지(平氏)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겐페이 합전(源平合戰)이다. 전쟁을 주도한 양측 대표 가문이 미나모토(겐지)와 타이라(헤이지)라서 ‘미나모토-타이라 전쟁’이라고도 한다. 1185년까지 이어진 전쟁에서 겐지가 이겼다. 미나모토 가문은 헤이지 정권을 무너뜨리고, 1192년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를 세웠다. 전쟁 당시 겐지는 흰색, 헤이지는 붉은색 깃발을 사용했다. 일..

분수대 2021.01.30

[분수대] 선거[출처: 중앙일보]

박진석 사회에디터 아테네 거리의 소시지 상인이 정치 입문 제안을 받는다. 그에게 정치인의 공통된 특징, 즉 ▶미천한 출신 ▶장사 솜씨 ▶뻔뻔스러움 ▶막무가내 ▶온 가족의 무례함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권유자는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비열하고 무지해야 하네”라고 강조했다. 거의 2500년 전에 나온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기사’(hippheis) 중 한 대목이다. 민주정 하에서의 ‘정치인 비난하기’가 얼마나 오래된 유희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치인의 특징들이 가장 잘 표현되는 때가 선거철이다. 둘도 없는 공복인 것처럼 한껏 몸을 낮추면서 당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로마 공화정 시절의 정치가 키케로는 “여론의 물결에 휩쓸리는 우리 같은 사람은(중략) 절대로 싫증 내지..

분수대 2021.01.30

[분수대] 코로나 카스트[출처: 중앙일보]

하현옥 복지행정팀장 신약성서의 마지막 장인 ‘요한묵시록(요한계시록)’에는 심판의 날에 신을 대신해 인간의 죄를 벌하는 ‘네 명의 기사(騎士)’가 등장한다. 질병의 백기사와 전쟁의 적기사, 기근의 흑기사, 죽음의 청기사다.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는 불행한 사건을 상징한다. 역사학자인 발터 샤이델은 『불평등의 역사』에서 이에 빗댄 ‘평준화의 네 기사’를 명명했다. 대중을 동원한 전쟁과 변혁적 혁명, 국가 붕괴(혹은 실패),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소득과 부의 분배를 압박해, 경제적 불평등과 빈부 격차를 좁힌 격렬한 충격을 이렇게 부른 것이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평준화는 이처럼 강력한 충격으로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빈부를 가리지 않는 바이러스의 무자비함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간..

분수대 2021.01.30

[분수대] 별다줄[출처: 중앙일보]

장혜수 스포츠팀장 언어의 특성 중 하나가 경제성이다. 한정된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다양한 단어와 문장을 만든다. 그 과정에서 이해와 소통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가능한 한 줄여서 통용하려고 한다. 그 결과가 줄임말(준말)이다. 줄임말은 한글날 단골 비판 레퍼토리다. 줄임말이 언어를 파괴하고 퇴화시킨다고 그 사용자를 나무란다. 그런다고 줄임말이 줄지 않는다. 문자 메시지 등 통신 언어를 많이 쓰는 데 따라 함께 늘어나는 추세다. 줄임말은 특정 집단의 동질성을 강화한다. 특히 세대 집단, 그중에서도 젊은 층에서 그렇다. 줄임말이 요즘의 유행만도 아니다. 30~40년 전의 젊은 층도 ‘우심깜뽀’(우리 심심한데 깜깜한 데서 뽀뽀할까), ‘라보때’(라면 보통으로 끼니 때우기) 등 그들만의 줄임말을 썼다. 줄임말은..

분수대 2021.01.30

[분수대] 카이사르와 검찰[출처: 중앙일보]

박진석 사회에디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거두, 개혁의 주도자, 속주를 넓히고 국부(國富)를 키운 영웅이었다. 로마 시민은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만년(晩年)의 그는 명백한 공화정의 적이었다. 갈리아 평정 후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한 쿠데타의 수괴였고, 2인 공동 집정관 체제를 무너뜨린 준(準) 황제급 종신 독재관이었다. 암살자들이 내세운 표면적 이유도 그가 황제 등극을 꿈꾼다는 것이었다. 그 카이사르를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후보자였던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이 검찰 비판의 도구로 끄집어냈다. 공권력 보유자에 대한 찬양의 위험성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를 제시한 것이다. 온당한 비교일까. 카이사르는 체제 전복 미수범으로 볼 수 있지만, 검찰은 과잉 수사 논란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국민과 대통령이 위..

분수대 2021.01.30

[분수대] 2020년 국채보상운동[출처: 중앙일보]

하현옥 복지행정팀장 “읍내에 거주하던 정씨 부인이 은가락지 한 쌍을 냈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에 실린 내용이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이 일본에서 빌린 돈(차관) 1300만원을 국민이 갚자는 운동이다. 경제 예속을 막으려 전 국민이 담뱃값을 아끼고 패물을 내 나랏빚을 갚는 애국운동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됐던 ‘금 모으기 운동’과 궤를 같이한다. 도로와 학교 등을 지으려 일본에서 관세 수입을 담보로 ‘강제로 빌린’ 차관 1300만원은 당시 대한제국 1년 국가 예산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경제를 파탄 내려던 일본의 야욕에 대한제국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이를 막기 위해 고종부터 관료, 민족자본가와 지식인, 부녀자까지 ..

분수대 2021.01.30

[분수대] 충무(忠武)[출처: 중앙일보]

장혜수 스포츠팀장 조선 인조는 1643년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1598년 12월 노량대첩에서 전사한 지 45년 만이다. ‘영화의 거리’로 불렸던 서울 충무로는 장군의 시호에서 명칭을 따왔다. 거리명 유래에는 두 가지 설명이 있다. 충무로가 일본강점기 혼마치도리(本町通)로 불린 일본인 거주지였다. 해방 후 그 잔재를 없애는 차원에서 장군 시호를 거리명으로 삼았다는 거다. 또 장군이 태어난 한성부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과 일대를 충무로로 했다는 거다. 475년 전인 1545년 오늘(4월28일), 이순신 장군이 탄생했다. 당초 이순신 장군 시호 후보는 충무, 충장(忠壯), 무목(武穆) 등 세 가지였다. 충(忠)은 일신의 위험을 마다치 않고 임금을 받들었다는, 무(武)는 적의 창..

분수대 2021.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