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41) 방안에 켰는 촛불

(41) 방안에 켰는 촛불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방안에 켰는 촛불 이개 (1417∼1456) 방안에 켰는 촛불 눌과 이별 하였관데 눈물을 흘리면서 속타는 줄 모르는고 우리도 저 촛불 같아야 속타는 줄 모르노라 - 병와가곡집 사람들은 눈물의 연유를 모른다 방안에 촛불이 타고 있다. 촛농이 녹아 초를 타고 내린다. 마치 초가 눈물을 흘리는 듯하다. 저 초는 누구와 이별을 해서 저렇게 눈물을 흘리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 초는 제가 속 타는 줄을 모르고 있다. 우리도 그와 같다. 이렇게 흘리는 눈물이 왜 그러는지를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내 속은 타들어 가고, 그래서 흘리는 눈물인 줄을…. 이개는 1436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갔다. 문종 때는 좌문학으로서 세자를 지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니 단종의 스..

(40) 독작(獨酌)

(40) 독작(獨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독작(獨酌) 박시교 (1945∼) 상처 없는 영혼이 세상 어디 있으랴 사람이 그리운 날 아, 미치게 그리운 날 네 생각 더 짙어지라고 혼자서 술 마신다 - 독작(2004. 작가) “남루할지라도 비루하지 않으리라.” 혼자서 술을 마신다. 미치도록 사람이 그리운 날은 네 생각이 더 짙어지라고 마신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요즘 상황을 그린듯한 시조다. 코로나19 방역으로 우리는 고향 가기도 망설여지는 추석을 보내야 했다. 민주화의 상징인 광화문광장엔 거대한 경찰차벽이 서고 대부분의 시위가 금지됐다. 결혼식장이나 상가도 마음 놓고 갈 수가 없다. 마스크로 얼굴은 가려야 하고, 어딜 가나 나의 행적은 드러내 놓아야 한다. 이 기막힌 세상에서 사람이 더욱 그립..

(39) 회고가(懷古歌)

(39) 회고가(懷古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회고가(懷古歌) 원천석(1330∼?)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 청구영언 왕이 찾아 헤맨 스승 1392년, 고려가 망했다. 유신(遺臣)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고려의 궁궐터 만월대(滿月臺)를 찾았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운수에 달려 있으니 마치 가을 풀잎과 같다. 오백 년 고려의 왕업이 목동의 피리 소리에 담겨 있구나. 때는 석양, 지나는 길손이 눈물겨워 한다. 운곡은 고려말 정치의 어지러움을 보고 치악산에 들어가 부모를 봉양하며 숨어 살았다. 이방원을 가르쳐 18세 때 고려조의 과거에 장원 급제하자 당시 변방의 장군이었던 이성계는 ‘가문의 위상을 세웠다..

(38) 해월(海月) - 칠암 앞바다에서

(38) 해월(海月) - 칠암 앞바다에서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해월(海月) - 칠암 앞바다에서 이석규(1943∼ ) 어둠속 꿈의 군무(群舞) 윤슬들이 부딪치고 환희의 미풍 속에 저 바다가 몸을 푸네. 황금 물 뚝뚝 흘리며 치솟는 저 달덩이! - 20세기에서 온 편지 코로나 공포 속에 맞는 추석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칠암리에서 본 밤바다의 풍경이다. 달빛에 반짝이는 밤 물결이 어둠 속 꿈의 군무와 같다. 마침내 저 바다가 미풍 속에 몸을 푸는구나. 황금 물 뚝뚝 흘리며 달덩이를 분만하다니…. 매우 입체적인 동영상을 보는 듯하다. 관찰이 치밀하며 표현이 섬세하다. 그리고 독창적이다. “인공지능에 무지하던 20세기적 소소한 인정을 모아 시조집으로 엮었다”고 한다. 이석규 시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기조는..

(37) 대조 볼 붉은 골에

(37) 대조 볼 붉은 골에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대조 볼 붉은 골에 황희 (1363∼1452) 대조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뜻드리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익자 체 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 청구영언 오늘에 생각해보는 청백리 대추의 볼이 빨갛게 익은 골짜기에 밤은 어찌 떨어지며, 벼 베어낸 그루터기에 게는 어찌 내려오는고. 술이 익자 때마침 체 장사가 지나가니 걸러서 아니 먹고 어찌하겠는가. 늦가을 추수가 끝난 농촌의 한가로운 풍경을 그리고 있다. 대추와 밤이 익고, 게도 기어 내려오니 술안주가 기가 막히게 마련됐는데, 술은 익고 체 장사마저 지나간다.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절로 군침이 돈다. 방촌(厖村) 황희(黃喜)는 공민왕 12년에 개성에서 태어나 성균관 학록으로 있을 때..

(36) 저물 듯 오시는 이

(36) 저물 듯 오시는 이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저물 듯 오시는 이 한분순 (1943∼) 저물 듯 오시는 이 늘 섧은 눈빛이네. 엉겅퀴 풀어놓고 시름으로 지새는 밤은 봄벼랑 무너지는 소리 가슴 하나 깔리네. - 심상(1976년 11월) 서정의 한 성취 아름다운 작품이다. 서정의 한 성취를 보여준다. 늘 섧은 눈빛으로 저물 듯 오시는 이. 시름으로 지새는 밤은 풀어놓은 엉겅퀴 같다. 얼마나 기가 막히면 가슴 하나 깔리는 봄벼랑 무너지는 소리겠는가? ‘거리두기’로 사람과 사람이 소원해지는 시대. 그래서 사람이 더욱 그립다. 이 시조는 행 구분을 이미지 전개에 따라 나누는 형태상의 과감한 변화를 꾀했다. 당시만 해도 낯설었던 이런 시도는 그 뒤 많은 젊은 시인들이 따라 했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초정 김상옥..

(35) 강호한정가(江湖閑情歌)

(35) 강호한정가(江湖閑情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강호한정가(江湖閑情歌) 월산대군 (1454-1488) 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 청구영언 왕의 형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으로 서경적인 작품이다. 가을 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다. 낚시를 드리우나 고기는 물지 않는다.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를 저어 온다. 물욕과 명리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을 밤과 찬 물결, 달빛, 빈 배가 형성하는 한적한 심상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이런 류의 시를 강호한정가라 부른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은 세조의 장손이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 세조가 승하하자 장자..

(34) 대

(34) 대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대 김교한 (1928- ) 맑은 바람 소리 푸르게 물들이며 어두운 밤 빈 낮에도 갖은 유혹 뿌리쳤다 미덥다 층층이 품은 봉서 누설 않는 한평생. -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85 ‘미완성 설경 한 폭’ 경남의 혼을 지키는 향토 시인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우리가 사는 한평생에는 얼마나 유혹이 많은가? 어두운 밤 빈 낮에도 갖은 유혹을 뿌리치고, 층층이 품은 봉서(封書)를 한평생 누설 않다니, 아! 그 얼마나 미더운가? 진정 만나고픈 모습을 대에서 본다. 대는 그리하여 맑은 바람 소리를 푸르게 물들일 수 있는 것이다. 김교한 시인은 울주에서 태어나 경남 지역에서 교직에 봉직한 분이다. 1994년 마산양덕중학교 교장직에서 정년퇴직하기까지 40여 년 교단을 지켰다. 19..

(33) 경세가(警世歌)

(33) 경세가(警世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경세가(警世歌) 김수장 (1690∼?) 검으면 희다하고 희면 검다하네 검거나 희거나 옳다할 이 전혀 없다 차라리 귀먹고 눈감아 듣도 보도 말리라 - 해동가요(海東歌謠) 시조로 노래한 정치적 허무주의 이쪽이 검다고 하면 저쪽은 희다고 한다. 한편이 희다고 하면 또 한편은 검다고 한다. 상대방의 의견에 옳다고 할 이는 전혀 없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귀먹고 눈 감아서 듣지도 보지도 말아야겠다. 이 시조는 경종 때 병약한 왕의 후사를 두고 노론과 소론이 벌이는 당쟁을 보고 당대의 가객인 노가재(老歌齋) 김수장(金壽長)이 시조로 읊은 것이다. 양극단만 있을 뿐 타협이나 중도는 발붙일 곳이 없는 정치적 허무주의를 읊은 것이다. 이 당쟁은 결국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번..

(32) 석가의 생애

(32) 석가의 생애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석가의 생애 조오현 (1932∼2018) 강물도 없는 강물 흘러가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 범람하게 해놓고 강물도 없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뗏목다리 - 한국대표명시선 100 〈마음 하나〉 우리 시대 우뚝한 시승(詩僧) 설악산 신흥사에 대한불교 조계종 기본선원이 섰을 때, 스님을 뵈러 갔었다. 법당을 가득 메운 스님들과 일반 신도들 앞에서 조실이신 설악 무산 대종사의 법어가 있었다. 시인 큰스님은 법어의 마지막을 자신이 쓴 이 시조로 갈무리하셨다. 큰스님의 법어가 끝나자 대중 스님들이 일제히 “석가모니불”을 소리쳐 불렀다. 그렇다. 2600년 전 붓다께서는 큰 가르침으로 강물도 없는 강물을 흘러가게 해놓으셨다. 그 흐름이 큰 감동을 불러일으켜 세상에 범람하게 하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