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31) 훈민가(訓民歌)

(31) 훈민가(訓民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훈민가(訓民歌) 정철(1536~1593)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보아 뉘 손에 태어났기 모양조차 같은가 한 젖먹고 길러났으니 딴 마음을 먹지 마라 - 송강가사 시로 쓴 포고문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지방관으로 부임하면 자신의 시정 방침을 포고문이나 유시문으로 알리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그런데 이 시인 관찰사는 훈민가 16수를 지어 널리 부르게 했다. 훈민가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임금에 대한 충성, 부부애와 노인에 대한 공경, 우정과 농사일의 즐거움 등을 담고 있다. 소개한 작품은 형제간의 우애를 당부하는 시조다. 그런데 이 시조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종장 첫 구는 석 자가 일반적인데 여기서는 넉 자로 되어 있다. 이는 고시조에도 매..

(30) 그날의 추상

(30) 그날의 추상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그날의 추상 윤금초 (1941~) 계룡산 으늑한 골짜기 장작가마 불길 속 꽃도 날치도 아닌 검은 추상 무늬를 입고 치기가 뚝뚝 흐르는 막사발 하나 몸을 튼다. -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29 치기가 보여주는 추상 조선 막사발은 치기가 뚝뚝 흐른다. 그것은 꽃 같은 어여쁨도 날치 같은 민첩함도 없다. 시인은 그것을 검은 추상 무늬로 본다. 계룡산 으늑한 골짜기에서 몸을 트는 추상이다. 본명은 금호(金鎬). 1967년 시조문학 천료,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하였다. 사설시조의 현대적 수용에 몰입해 현대시조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소개한 단시조에서는 현대시의 추상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는 2004년 시조 전문 교육기관인 사단법인 민족시사..

(29) 내 뜻대로 하리라

(29) 내 뜻대로 하리라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내 뜻대로 하리라 김창업 (1658-1721)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할 이 뉘 있으며 의원이 병 고치면 북망산이 저러하랴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 병와가곡집 정치의 검은 힘 벼슬이 아무리 좋다지만 모두 벼슬만 하겠다고 나서면 농사는 누가 짓는단 말인가? 의원이 모든 병을 다 고친다면 무덤들은 왜 저리 많단 말인가?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참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아이야, 잔 가득 술을 부어라.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인 노가재(老稼齋) 김창업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자 문인이다. 그는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에 봉하려는 숙종에 반대하다 사사(賜死)되는 아버지를 보며 벼슬에 뜻을 접었다. 1689년에 그가 그린 스승 우암 송시열의 초상을 화공이..

(28) 물소리

(28) 물소리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물소리 이상범(1935-) 물소리 베고 누우면 별자리도 자리를 튼다 적막의 끝을 잡고 한 생각 종지로 밝히면 구천동(九千洞) 여문 물소리가 산을 끌고 내려온다. - 녹차를 들며(2019) 디카 시조의 새로운 경지 ’신흥균 화백의 다완“ 1963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해 시력 57년을 기록하고 있는 녹원(綠原) 이상범(李相範) 시인은 1987년 직접 친 난 그림을 넣은 컬러 시화집 ‘하늘의 입김, 땅의 숨결’, 1995년에는 펜화 시조집 ‘오두막집행’, 2004년에는 시화집 ‘시인의 감성화첩’ 발간에 이어 2007년에는 디지털 카메라(디카)로 직접 찍은 사진을 곁들인 디카 시조집 ‘꽃에게 바친다’를 펴냈다. 녹원 선생은 디카로 찍은 사진을 포토샵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시적..

(27) 지당(池塘)에 비 뿌리고

(27) 지당(池塘)에 비 뿌리고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지당(池塘)에 비 뿌리고 조헌 (1544~1592)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楊柳)에 내 끼인제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에 무심한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노매 - 청구영언 위기에는 나라를 누가 지키나 연못에 비가 뿌리고 버드나무는 안개에 가려져 있다. 뱃사공은 어디로 가고 빈 배만 매여 있는가? 해 질 무렵 아무 생각 없는 갈매기만 오락가락하는데···. 참으로 서경적인 작품이다. 일상의 발길을 잠시 멈추고 바라보아야 보이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중봉 조헌은 보은현감으로 근무할 때 대간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자 옥천 밤티(栗峙)이 들어가 학문에 몰두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일본 사신 겐소(玄蘇)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

(26) 장성 갈재

(26) 장성 갈재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장성 갈재 조종현 (1906-1989) 동란에 울었겄다 장성 갈재 엉엉울어 산신령 있다 하면 저도 넋을 잃었으리 오늘은 잠풍한 날씨 구름 동동 떴구마는. -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언제 진정한 평화가 올까? 장성 갈재는 전남과 전북의 도 경계를 이루는 고개다. 갈재라는 이름은 갈대가 많다 해서 붙은 것인데 일제 강점기에 한자식 노령(蘆嶺)으로 바뀌었다. 노령산맥이란 이름이 여기에서 나왔다. 그런데 실제는 억새가 만발하다. 영조 때의 문신 이정보가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라고 노래했던 산세가 험한 곳이다. 동학농민전쟁 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성 황룡 전투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전주를 향해 넘던 고개이기도 하다. 6·25의 참극은 이곳도 비껴가지 않았다...

(25)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25)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이매창 (1573~1610)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 가곡원류 전란의 시대, 고독과 이별의 시인 아전의 서녀 이향금은 기생이 된 것으로 보아 어머니도 기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는 매창, 계유년에 태어났다 하여 계생(癸生) 또는 계랑(桂娘)이라고도 불렸다. 1591년 봄, 부안에서 유희경을 만나 시를 주고받다 사랑에 빠졌다. 천민 출신이었으나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류했던 시인 유희경과는 스물여덟 살의 나이 차이도 둘의 사랑을 막진 못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희경은 의병을 모아 참전했다. 매창의 시조에 답하는 유희경의 시가 있다..

(24) 목련

(24) 목련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목련 이근배(1940-) 누이야 네 스무 살 적 이글거리던 숯불 밤마다 물레질로 뽑아올리던 슬픔 누이야 네 명주빛 웃음이 눈물처럼 피었다 - 한국대표명시선 100 걸어다니는 현대문학사 스무 살 적 누이는 밤마다 물레를 자았다. 가슴에 그 무슨 이글거리던 숯불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그 슬픔을 물레질로 뽑아 올렸던 것일까? 어느새 화사하게 완성되는 명주. 눈물처럼 피었기에 그토록 아름다운가. 사천(沙泉) 이근배(李根培) 선생은 1961년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을 시작으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신춘문예, 문공부 신인예술상, 영릉왕 환국기념 백일장을 석권했으니 60년대 전반기는 그의 시대였다. 율곡 이이가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아홉 번을 해 구도장원공(九度壯..

(23) 묏버들가(歌)

(23) 묏버들가(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묏버들가(歌) 홍랑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 오씨장전사본(吳氏藏傳寫本) 죽음으로도 못 가른 사랑 고죽 최경창(1539~1583)이 북평사로 제수되어 함경도 경성으로 가다가 자신의 시를 읊는 관기 홍랑을 만난다. 둘은 꿈같은 시간을 보냈으나 최경창의 관직이 바뀌어 한양으로 떠나게 되자 홍랑은 함경도 주민이 넘을 수 없는 쌍성까지 따라와 작별을 하고 돌아갔다. 최경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자 즉일로 떠나 걸어 7주야 만에 한양까지 와 극진히 간호하나 국상 중에 함경도 기생과 살림을 차렸다고 조정에 알려져 최경창은 파직되고 홍랑은 홍원으로 돌아갔다. 헤어지며 고죽이 홍랑에게 ..

(22) 여일(餘日)

(22) 여일(餘日)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여일(餘日) 김제현(1939- ) 그리하여 모든 것은 지나가고 남은 자리. 잔잔한 감동이 수묵 속에 번지고 한 소절 비가 내렸다. 눈부신 목련의 오후. - 한국시조큰사전 남은 날은 아름답다 시조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여일’이란 남은 날을 이름이다. 남은 날은 가능성과 희망 그리고 꿈을 안고 있는 시간이다. 이 시인에게 남은 날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수묵 속에 번지는 잔잔한 감동’ ‘한 소절 비가 내린 눈부신 목련의 오후’다. 우리의 생애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니 남은 시간을 섣불리 재단하지 마라.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황홀하다. 그의 시 세계를 가장 잘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나는 ‘여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