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가 있는 아침 151

(21) 탄로가(嘆老歌)

(21) 탄로가(嘆老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탄로가(嘆老歌) 우탁 (1262-1342)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청구영언 가장 오래된 시조 이 작품은 전해지는 시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한 가장 오래 패러디되어 불리고 있는 시조이기도 하다, 춘향전에 ‘탄로가’가 나오고, 잡가 ‘백발가’도 이 시조의 발상을 그대로 따와 ‘오는 백발 막으려고 우수에 도끼 들고 좌수에 가시 들고 오는 백발 두드리며 … 가는 홍안 절로 가고 백발은 스스로 돌아와 귀 밑에 살 잡히고 검은 머리 백발되니’로 노래한다. 최고 최장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시조라고 하겠다. 우탁은 호 역동(易東)이 암시하듯이 뛰어난 역학..

(20) 희우(喜雨)

(20) 희우(喜雨)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희우(喜雨) 최승범 (1931- ) 호박잎 비 듣는 소리 휘몰이 장단이다 - 어 시원하다 - 어 시원하다 목이 탄 푸성귀들은 신바람에 자지러진다 - 우리시대현대시조100인선 사람이 시고, 시가 사람 휘몰이 장단처럼 시원한 작품이다. 시인의 귀는 가뭄에 목이 탄 푸성귀들이 비를 맞아 신바람에 자지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두보의 시 ‘봄밤에 내리는 반가운 비(春夜喜雨)’에서 ‘좋은 비는 때를 알아 내리니/봄을 맞아 만물이 싹을 틔운다(好雨知時節/當春乃發生)’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1300년을 격하고 있는 두 시인의 만남이 새롭다. 중장에서 약간의 변형을 꾀했다. 그는 절장시조, 양장시조도 시도하였다. 선비의 품격을 보여주는 최승범 시인은 신석정 시인의 맏사위이다. 신..

(19) 사랑은 거짓말

(19) 사랑은 거짓말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사랑은 거짓말 김상용 (1561~1637) 사랑이 거짓말이 님 날 사랑 거짓말이 꿈에 와 뵈단 말이 긔 더욱 거짓말이 나같이 잠 아니 오면 어느 꿈에 뵈리오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강골의 열사도 사랑에는 약하다 사랑은 거짓말이다. 님이 날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꿈에 찾아와 모습을 보여주겠다지만 그것은 더욱 거짓말이다. 나는 상사병으로 아예 잠이 들지 못하는 데 어느 꿈에 볼 수 있단 말인가? 사랑 노래가 많지만 이런 절창이 고시조에 있다. 더욱이 이 시조를 지은 분은 강골의 정치인이요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문루에 화약을 쌓고 불을 붙여 터뜨려 순절한 열사였다. 우의정을 지낸 판논녕부사였던 그는 세자빈과 원손 등 왕족을 모시고 강화도에 건너갔..

(18) 어화(漁火)

(18) 어화(漁火)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어화(漁火) 유성규(1931-) 불 밝힌 머언 바다 가난한 마음들이 시들한 등 너머로 물살되어 퍼지고 모두는 저승을 불러 요정으로 피는 꽃 - 시조문학 제14호 (1966.9) 시조의 생활화에 이어 세계화로 어화란 고기잡이하는 배에 켜는 등불이나 횃불이다. 밤새 노동에 지친 어부들의 등 너머로 배가 만드는 물살이 퍼진다. 해변에서 보는 어화는 마치 저승의 풍경을 보는 듯하다. 요정들이 노니는 것처럼, 밤바다에 핀 꽃처럼 아름답다. 이승이 저승이요, 저승이 곧 이승이 아니겠는가? 서정적 이미지 묘사가 빼어나다. 시천 유성규 선생은 현대시조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신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창립위원으로서 초대, 2대 총무이사를 지내며 현대시조단 종가의 기틀을 다졌다...

(17) 간밤에 부던 바람

(17) 간밤에 부던 바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간밤에 부던 바람 선우협 (1588-1653) 간밤에 부던 바람 만정도화(滿庭桃花) 다 지거다 아이는 비를 들고 쓸으려 하는구나 낙환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 하리요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떨어진 꽃도 꽃이다 봄바람이 거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뜰에 가득 피어 있던 복사꽃이 다 떨어졌다. 아이는 비를 들고 쓸으려 한다. 떨어져 있어도 꽃은 꽃이다. 쓸어 무엇하겠는가? 선우협은 선조대부터 광해군, 인조, 효종 연간을 산 평북 출신의 성리학자다. 유년기에 임진왜란을 보았고, 30대에 인조반정으로 한때의 권력자들이 봄꽃처럼 피 흘리며 스러져가는 것을 목도하였다. 이런 영향 때문이었을까? 당대에 그의 문명은 드높아 여러 차례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

(16) 고무신

(16) 고무신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고무신 ㅡ시각서정(視覺抒精) · 1 장순하(1928~) 눈보라 비껴 나는 전ㅡㅡㅡ군ㅡㅡㅡ가ㅡㅡㅡ도(全群街道) 퍼뜩 차창으로 스쳐 가는 인정아! 외딴집 섬돌에 놓인 하 나 둘 세 켤레 -백색부(1968) 고무신 - 시각서정(視覺抒精)·1 현대시조의 새 영역을 개척한 사봉(史峯) 시조가 이 정도 되면 고유의 형식을 넘어 회화성마저 띠게 된다. 눈보라 날리는 날, 전주와 군산을 잇는 도로를 달리며 본 풍경을 스케치했다. 외딴집 섬돌에 놓인 세 켤레 신. 두 내외의 신 사이에 아이의 신이 놓였다. 그것을 시인은 ‘퍼뜩 차창으로 스쳐 가는 인정’이라고 썼다. 이 작품은 시조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시인의 뜻은 실험 정신을 실제적으로 구현해보고자 함에 있었을 것이다. 이른바..

⑮ 봄이 간다커늘

⑮ 봄이 간다커늘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봄이 간다커늘 -무명씨 봄이 간다커늘 술 싣고 전송가니 낙화 쌓인 곳에 간 곳을 모르노니 유막(柳幕)에 꾀꼬리 이르기를 어제 갔다 하더라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노래만 남아 있는 이름 없는 가인(歌人)들 봄이 간다고 해서 술을 싣고 전송을 갔다. 낙화는 수북한 데 봄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 없다. 버드나무가 울울히 막처럼 드리워진 곳에서 꾀꼬리 울음만 들린다. 그 새가 이르기를 봄은 바로 어제 갔다고 하네. 아차 한발 늦었구나. 기지와 상상력이 번득인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명작을 지은 이의 이름을 알 길이 없다. 고시조에는 작자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작품들이 많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평민, 기녀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부른 노래(唱)였다. 시조에 이..

⑭ 갈매기

⑭ 갈매기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갈매기 -이태극 (1913-2003) 햇빛은 다사론데 물결 어이 미쳐 뛰나 뜨락 잠기락하여 바람마저 휘젓다가 푸른 선 아스라 넘어 날라 날라 가고나 온 국민이 코로나 사태로 인한 불안감 - 시조연구(1953) 오늘의 시조단을 이룬 넉넉한 품 고시조를 집대성하고 현대시조를 이론과 작품으로 체계화한 월하 이태극의 데뷔작이다. 선생이 박병순, 한춘섭과 함께 엮은 『한국시조큰사전』(1985. 을지출판공사)에는 이 작품을 1952년 5월, 영도에서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이전까지 선생은 서울대와 이화여대, 동덕여대에 출강하며 시조의 이론 연구에 몰두해오다가 6·25 동란을 맞아 40대 부산 피난 시절에 직접 시조를 창작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 화천이 고향인 선생은 ..

⑬ 얼어 잘까? 녹아 잘까?

⑬ 얼어 잘까? 녹아 잘까?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얼어 잘까? 녹아 잘까? -임제 (1549~1587)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집을 나니 산 위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무슨 말? 녹아 자야지 조선의 3대 천재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평양에서 기생 한우(寒雨)를 만났다. ‘찬비’라는 그녀의 이름에 빗대 백호가 시조 한 수를 노래한다. 찬비를 맞았으니 얼어 잘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해학이다. 명기 한우가 그냥 있을 리 없다. 즉석에서 시조로 받아치니 이런 노래다. 어이 얼어 자리 무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찬비를 맞..

⑫ 탑·3

⑫ 탑·3 중앙일보 유자효 시인 탑·3 -이영도(1916-1976)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愛慕)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 석류 (1968.2) 황진이 이후의 멋진 여인이자 시인 1967년 2월 13일 저녁, 젊은 시절에 만난 정운 이영도를 평생 사랑해 5000여 통의 편지를 보낸 청마 유치환이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정운의 이 시조는 청마에 대한 추모의 정을 읊은 것으로 보인다. 생활과 환경, 종교 등 그녀의 다양한 작품 세계에 대해 조남현 서울대 교수는 ‘현대시조는 이영도에 와서 확실하게 소재 확대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월하 이태극은 ‘정운은 황진이 이후의 멋진 여인이자 시인이었다’고 극찬했다. 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