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538] 물경소사 (勿輕小事)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진평(陳平)이 음식을 조리할 때 고기를 모두에게 균등하게 나눠주어 눈길을 끌었다. 끝내는 천하를 요리하는 지위에 올랐다. 임안(任安)이 사냥을 나가 함께 잡은 사슴과 고라니, 꿩과 토끼를 분배하는데, 사람들이 모두 임안이 공평하게 나눈다고 입을 모았다. 뒤에 그 또한 기절(氣節) 있는 인물로 이름났다. 사현(謝玄)이 환사마(桓司馬) 아래서 일할 때였다. 그는 신발을 신을 때조차 흐트러짐 없이 반듯했다. 사람들이 그가 장수의 역량이 있음을 그것을 보고 알았다. 사람은 사소한 일조차 소홀하게 대충해서는 안 된다. 사소한 한 가지 일에서 그 사람의 바탕이 훤히 드러난다. '문해피사(文海披沙)'에 나온다. 작은 일을 건성으로 하면서 큰일을 촘촘히 살필 수 없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

[정민의 世說新語] [537] 지인안민 (知人安民)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청나라 건륭제(1711~1799)는 63년간 재위하다가 만 88세로 세상을 떴다. 그는 재위 기간에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펴내는 등 중국 문화 선양에 크게 공헌했다. 마상황제(馬上皇帝)란 말이 있을 만큼 전역을 순행(巡幸)했고, 평생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상에 남긴 시가 4만2000여 수다. 그의 치세(治世) 경륜을 담은 어록집 '건륭잠언(乾隆箴言)'을 읽었다. 경험에서 나온 묵직한 말이 적지 않다. 특별히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중시했다. "임금 노릇이 무에 어려우랴. 사람 알아보기가 가장 어렵다(爲君奚難? 難于知人)."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을 임금의 가장 큰 덕목으로 꼽았다. "자식을 잘못 아는 것은 그 해가 오히려 한 집안을 넘지 않는다. 신하를 잘못 알아보면 ..

[정민의 世說新語] [536] 오자탈주 (惡紫奪朱)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논어 '양화(陽貨)'편에 '자주색이 붉은색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고, 정나라의 음악이 아악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며, 말 잘하는 입이 나라를 뒤엎는 것을 미워한다(惡紫之奪朱也, 惡鄭聲之亂雅樂也, 惡利口之覆邦家者)'고 했다. 잡색인 자주색이 원색인 붉은색의 자리를 차지했다. 정나라의 자극적인 음악이 유행하자 정격의 아악은 퇴물 취급을 받는다. 더 큰 문제는 번드르르한 말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최근 한국 가톨릭 교회의 창설 주역 이벽(李檗·1754~1785)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성교요지(聖敎要旨)'를 둘러싼 논란이 시끄럽다. 김양선 목사가 1930년대에 '만천유고(蔓川遺藁)' 등 여러 초기 천주교 서적을 구입해 1960년대에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기증했다. 여기 실린 '..

[정민의 世說新語] [535] 세재비아 (世財非我)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곡산 부사 시절 다산이 고을의 토지문서를 살펴보았다. 100년 사이에 보통 대여섯 번 주인이 바뀌고, 심한 경우 아홉 번까지 바뀌었다. 다산이 말했다. "창기(娼妓)는 남자를 자주 바꾼다. 어찌 내게만 유독 오래 수절하기를 바라겠는가? 토지를 믿는 것은 창기의 정절을 믿는 것과 같다." 부자는 넓은 밭두렁을 보며 자손을 향해 자랑스레 외친다. '만세의 터전을 너희에게 주겠다.' 하지만 그가 눈을 감기도 전에 그 자식은 여색과 노름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만다. 다산이 제자 윤종심(尹鍾心)에게 준 증언(贈言) 속에 나온다. 글의 문맥이 천주교 교리서 '칠극(七克)' 2장 '해탐(解貪)'의 내용과 흡사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탐욕스레 재물을 모으는 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를..

[정민의 世說新語] [534] 훼인칠단 (毁人七端)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남을 베고 찌르는 말이 난무한다. 각지고 살벌하다. 옳고 그름을 떠나 언어의 품위가 어쩌다 이렇게 땅에 떨어졌나 싶다. '칠극(七克)' 권 6의 '남을 해치는 말을 경계함(戒讒言)' 조를 읽어 본다. "남을 헐뜯는 데 일곱 가지 단서가 있다. 까닭 없이 남의 가려진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 첫째다. 듣기 좋아하는 것이 둘째다. 까닭 없이 전하고, 전하면서 부풀리는 것이 셋째다. 거짓으로 증거 대는 것이 넷째다. 몰래 한 선행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다섯째다. 드러난 선행을 깎아 없애는 것이 여섯째다. 선을 악이라 하는 것이 일곱째다. 그 해로움은 모두 같다(毀人有七端. 無故而露人陰惡一. 喜聞二, 無故而傳, 傳而增益三. 誑証四, 不許陰善五, 消明善六, 以善爲惡七. 其害俱等)." 남을 ..

[정민의 世說新語] [533] 소구적신 (消舊積新)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칠극(七克)'은 예수회 신부 판토하(Didace De Pantoja·1571~1618)가 1614년 북경에서 출판한 책이다. 한문으로 천주교 교리를 쉽게 설명했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조선의 많은 지식인이 이 책을 통해 천주교인이 되었다. 서문에서 말했다. "대저 마음의 병이 일곱 가지요, 마음을 치료하는 약이 일곱 가지다. 핵심은 모두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쌓는 것(消舊積新)에 불과하다." 이어 그는 교만함(傲)은 겸손으로 이기고, 질투(妬)는 어짊과 사랑으로 극복하며, 탐욕(貪)은 베풂으로 풀고, 분노(忿)는 인내로 가라앉힌다. 욕심(饕)은 절제로 막으며, 음란함(淫)은 정결로 차단하고, 게으름(怠)은 부지런함으로 넘어서야 한다며, 7장으로 나눠 그 방법을 구체화했다..

[정민의 世說新語] [532] 문슬침서 (捫虱枕書)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왕안석(王安石)은 두보(杜甫)의 시 중 '주렴 걷자 잠자던 백로가 깨고, 환약을 빚는데 꾀꼬리 우네(鉤簾宿鷺起, 丸藥流鶯囀)'란 구절을 아껴 뜻이 고상하고 묘해 5언시의 모범이 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다가 스스로 '청산에서 이 잡으며 앉아 있다가 꾀꼬리 울음소리에 책 베고 자네(靑山捫虱坐, 黃鳥枕書眠)'란 구절을 얻고는 자신의 시도 두보만 못지않다며 자부했다고 한다. 섭몽득(葉夢得)의 '석림시화(石林詩話)'에 나온다. 방 안 공기가 갑갑해서 주렴을 걷었다. 마당가 방죽에서 외다리로 졸던 백로가 그 소리에 놀라 깨서 저편으로 날아간다. 미안하다. 약 가루를 반죽해 손가락 끝으로 굴려 환약을 짓는데, 그 리듬에 맞춰서 꾀꼬리가 운다. 손가락 끝에서 꾀꼬리 울음이 데굴데굴 굴러간다..

[정민의 世說新語] [531] 취몽환성 (醉夢喚醒)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취생몽사(醉生夢死)는 정자(程子)가 '염락관민서(濂洛關閩書)'에서 처음 한 말이다. "간사하고 허탄하고 요망하고 괴이한 주장이 앞다투어 일어나 백성의 귀와 눈을 가려 천하를 더럽고 탁한 데로 빠뜨린다. 비록 재주가 높고 지혜가 밝아도 보고 들은 것에 얽매여 취해 살다가 꿈속에서 죽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邪誕妖異之說競起, 塗生民之耳目, 溺天下於汚濁. 雖高才明智, 膠於見聞, 醉生夢死, 不自覺也)." 정구(鄭逑·1543~1620)가 '취생몽사탄(醉生夢死嘆)'에서 말했다. "신묘한 변화 잘 알아 참몸을 세워서 바탕을 실천해야 생사가 편안하리. 어찌하여 제멋대로 구는 저 사람은 취몽(醉夢) 중에 늙어가며 끝내 깨지 못하누나. 대낮에 하는 일로 바른 길 막아 없애 가엾다 생생한 뜻..

[정민의 世說新語] [530] 타락수구 (打落水狗)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루쉰의 산문집 '투창과 비수'에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글이 있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권세를 믿고 날뛰며 횡포를 부리던 악인이 있다. 그런 그가 실족하게 되면 갑자기 대중을 향해 동정을 구걸한다. 상처를 입은 절름발이 시늉을 하며 사람들의 측은지심을 유발한다. 그러면 그에게 직접 피해를 보았던 사람들마저도 그를 불쌍히 보며, 정의가 이미 승리했으니 그를 용서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슬그머니 본성을 드러내 온갖 못된 짓을 되풀이한다. 원인은 어디에 있나? 물에 빠진 개를 때려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 제 무덤을 판 셈이니,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해서는 안 된다. 악인에 대한 징치를 분명하게 해두지 않고, 어설프게 용서하고 화해하는 페어플레이..

[정민의 世說新語] [529] 미견여금 (未見如今)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대순(李大醇)은 서얼이었지만 경학에 정통했고 예문(禮文)도 많이 알아, 어린이를 가르치는 동몽훈도(童蒙訓導) 노릇을 하며 살았다. 제자 중에 과거에 급제해서 조정에 선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금천(衿川) 땅에 유락해 먹고살 길이 없었다. 한 대신이 딱하게 보아 다시 훈도 노릇을 하게 해주었다. 이대순은 상경해서 남대문 안쪽 길가에 서당을 열었다. 원근에서 배우러 온 자가 많았다. 그의 학습법은 엄격했다. 전날 읽은 것을 못 외우면 종아리를 때렸다. 도착한 순서대로 가르쳤다. 교과과정은 엄격했고, 나이 순서로 앉혔다. 학생들이 성을 내며 대들었다. "아니 저 자식은 서얼인데 내가 그 아래에 앉으라고요?" "내가 조금 늦게 왔지만, 저 녀석이 감히 나보다 먼저 배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