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528] 성일역취 (醒日亦醉)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예전 한 원님이 늘 술에 절어 지냈다. 감사가 인사고과에 이렇게 썼다. '술 깬 날도 취해 있다(醒日亦醉).' 해마다 6월과 12월에 팔도 감사가 산하 고을 원의 성적을 글로 지어 보고하는데, 술로 인한 실정이 유독 많았다. "세금 징수는 공평한데, 술 마시는 것은 경계해야 마땅하다(斛濫雖平, 觴政宜戒)." "잘 다스리길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 술버릇을 어이하리(非不願治, 奈此引滿)." 정약용이 '다산필담(茶山筆談)'에서 한 말이다. '상산록(象山錄)'에서는 또 이렇게 썼다. '술을 즐기는 것은 모두 객기다. 세상 사람들이 잘못 알아 맑은 운치로 여긴다. 이것이 다시 객기를 낳고, 오래 버릇을 들이다 보면 술 미치광이가 되고 만다. 끊으려 해도 끊을 수가 없으니 진실로 ..

[정민의 世說新語] [527] 거안사위 (居安思危)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색(李穡·1328~1396)의 '진시무서(陳時務書)' 중 한 대목이다. '근래에 왜적 때문에 안팎이 소란스러워 거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편안함에 처하여서도 위태로움을 생각한다면(居安思危) 가득 차더라도 넘치지 않을 것입니다. 환난을 생각하여 미리 막는다면(思患豫防) 어찌 엉킨 문제를 도모하기 어렵겠습니까? 늘상 하던 대로 하다가 하루아침에 일이 생길 것 같으면 장차 무엇으로 이를 대비하겠습니까?' 이정암(李廷馣·1541~1600)의 '왜변록(倭變錄)'에 실린 서해도 관찰사 조운흘(趙云仡·1332~1404)이 임금에게 올린 글의 첫 대목이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집안이 넉넉하고 인구가 많으며 안팎으로 근심이 없을 때에도 오히려 거안사위하면서 두루두루..

[정민의 世說新語] [526] 행루오리 (幸漏誤罹)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1791년 11월 11일, 형조에서 천주교 신자로 검거된 중인(中人) 정의혁과 정인혁, 최인길 등 11명의 죄인을 깨우쳐 잘못을 뉘우치게 했노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정조가 전교(傳敎)를 내렸다. "중인들은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닌, 그 중간에 있어 교화시키기가 가장 어렵다. 경들은 이 뜻을 알아 각별히 조사해서 한 사람도 요행으로 누락되거나(幸漏), 잘못 걸려드는(誤罹) 일이 없도록 하라." 행루오리(幸漏誤罹)는 운 좋게 누락되거나 잘못해서 걸려드는 것을 말한다. 죄를 지었는데 당국자의 태만이나 부주의로 법망을 빠져나가면 걸려든 사람만 억울하다. 아무 잘못 없이 집행자의 단순 착오나 의도적 악의로 법망에 걸려들어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부정이나 청탁이 개입되기라도 하면 바로 국..

[정민의 世說新語] [525] 다행불행 (多倖不幸)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위백규(魏伯珪·1727~1798)가 1796년에 올린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읽는데 자꾸 지금이 겹쳐 보인다. "백성의 뜻이 안정되지 않음이 오늘날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등급이 무너지고 품은 뜻은 들떠 제멋대로입니다. 망령되이 넘치는 것을 바라고, 흩어져 음일(淫溢)함이 가득합니다. 사양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가 없고, 겸손한 뜻은 자취도 없습니다. 조정에 덕으로 겸양하는 풍조가 없고 보니 관리들은 모두 손을 놓고 있고, 마을에 스스로를 낮추는 풍속이 없는지라 위의 명령을 모두 거스릅니다. 본분을 어기고 윗사람을 범하여 불의가 풍속을 이루고, 함부로 나아가면서 욕심이 끝도 없어 염치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예의염치의 네 바탕이 사라지면 크고 작은 일이 엉망이 되어 마치 썩고..

[정민의 世說新語] [524] 신신신야 (信信信也)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믿을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의심할 것을 의심하는 것도 믿음이다. 어진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어짊이고, 못난 자를 천하게 보는 것도 어짊이다. 말하여 바로잡는 것도 앎이고 침묵하여 바로잡는 것도 앎이다. 이 때문에 침묵을 안다 함은 말할 줄 아는 것과 같다(信信信也, 疑疑亦信也. 貴賢仁也, 賤不肖亦仁也. 言而當知也, 默而當亦知也. 故知默猶知言也)." 순자(荀子) '비십이자편(非十二子篇)'에 나오는 구절이다. 신실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덮어놓고 믿지 않고 살피고 따져보아 믿을 만한 것을 믿는 데서 생긴다. 의심할 만한 일을 덩달아 믿어 부화뇌동하면 뒤에 꼭 후회하고 책임질 일이 생긴다. 다 잘해주고 무조건 베푸는 것이 인(仁)이 아니다. 그의 언행을 보아 그가 받을 만한 ..

[정민의 世說新語] [523] 식졸무망 (識拙無妄)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선조 때 박숭원(朴崇元·1532~1593)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대간(臺諫)들이 그가 오활(迂闊)하고 졸렬하다 하여 교체해야 한다며 탄핵했다. 임금의 대답이 이랬다. "세상 사람들이 온통 교묘한데 숭원이 홀로 졸렬하니 이것이 그에게서 취할 만한 점이다." 한번은 연석(筵席)에서 대신들의 능하고 못하고에 대해 논하였다. 임금이 말했다. "신식(申湜·1551~1623)은 졸렬하고 허성(許筬·1548~1612)은 고집스럽다." 신식은 꾸밀 줄 모르고, 허성은 원칙을 지킨다는 칭찬이었다. 신식은 임금께서 알아주심에 감격해서 자신의 호를 용졸재(用拙齋)로 지었다. 졸렬함으로 임금에게 쓰임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다. 최립(崔岦·1539~1612)은 '용졸재기(用拙齋記)'에서 "교(巧)..

[정민의 世說新語] [522] 주옹반낭 (酒甕飯囊)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최치원(崔致遠)이 양양(襄陽)의 이상공(李相公)에게 올린 글에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주옹반낭(酒甕飯囊)의 꾸짖음을 피할 길 없고, 행시주육(行尸走肉)의 비웃음을 면할 수가 없다(酒甕飯囊 莫逃稱誚 行屍走肉 豈逭任嗤)." 주옹반낭과 행시주육은 고사가 있다. 주옹반낭은 후한(後漢) 때 예형(禰衡)이 "순욱은 그래도 억지로라도 함께 얘기할 수 있지만, 그 밖의 사람들은 모두 나무 인형이나 흙 인형이어서 사람 같기는 한데 사람 같은 기운이 없으니 모두 술독이나 밥통일 뿐이다(荀彧猶强可與語 過此以往 皆木梗泥偶 似人而無人氣 皆酒甕飯囊耳)"라 한 데서 나왔다. '포박자(抱朴子)'에 나온다. 먹고 마실 줄만 알고 아무 역량도 없는 무능한 사람을 비유할 때 쓴다. 논형(論衡) '별통..

[정민의 世說新語] [521] 심동신피 (心動神疲)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당나라 때 중준(仲俊)은 나이가 86세인데도 너무나 건강했다. 비결을 묻자 그가 말했다. "어려서 '천자문'을 읽다가 '심동신피(心動神疲)'라고 말한 네 글자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지. 이후 평생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차분히 가졌을 뿐이라네." 그는 '천자문(千字文)'의 "성품이 고요하니 정서가 편안하고, 마음이 움직이자 정신이 피곤하다(性靜情逸 心動神疲)"는 구절에서 일생 공부의 화두를 들었던 셈이다. 우강(旴江)의 구도인(丘道人)은 90여 세로 온통 흰머리뿐이었지만 얼굴엔 늘 화색이 돌았다.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한 벌 홑옷으로 났고, 비와 눈을 막지 않았다. 그는 바구니 하나를 늘 지니고 다녔는데, 뒤편에 작은 패쪽 하나를 매달아 놓았다. 거기에는 시 네 구절이 적혀 ..

[정민의 世說新語] [520] 양탕지비 (揚湯止沸)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정조 22년(1798) 7월 27일 충청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정조에게 장계를 올려 매년 가을마다 실시해온 마병(馬兵) 선발 시험의 폐지를 청원했다. 혹심한 재해로 농사를 망쳐 생계가 어려운 데 시험장 설치 비용도 만만치 않고, 응시하는 백성들이 양식을 싸 오기도 힘든 상황이라 올해에 한해 시험을 폐지해 달라는 것이었다. 정조가 하교했다. "흉년에 백성을 살피는 일은 크고 작은 것 따질 것 없이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백성을 귀찮게 할 일은 일절 하지 말라. 그래야 '끓는 물을 퍼냈다가 다시 부어 끓는 것을 멈추게 한다(揚湯止沸)'는 나무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을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것이 부역을 면제해주는 것보다 훨씬 낫다."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 판..

[정민의 世說新語] [519] 사대사병 (四大四病)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경흥(憬興)은 신라 신문왕 때 국사(國師)였다. 경주 삼랑사(三郞寺)에 머물렀다. 병을 오래 앓았는데 잘 낫지 않았다. 한 비구니가 찾아와 뵙기를 청했다. 자리에 누운 경흥에게 그녀가 말했다. "스님께서 큰 법을 깨달았다고는 하지만 사대(四大)를 합쳐 몸이 된 것이니 어찌 병이 없겠습니까? 병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에서 생겨납니다. 첫째는 신병(身病)입니다. 풍황담열(風黃痰熱), 즉 풍이나 황달, 담과 열이 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심병(心病)으로 전광혼란(顚狂昏亂) 즉 미치거나 정신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이지요. 셋째는 객병(客病)입니다. 칼이나 몽둥이에 다치는 것이니, 동작으로 과로하여 생깁니다. 넷째는 구유병(俱有病)입니다. 기갈한서(飢渴寒暑)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