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518] 무연설설 (無然泄泄)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1689년 12월은 기상 재변이 잇따랐다. 흰 기운이 하늘로 뻗치고,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섣달인데도 봄 날씨가 이어졌다. 천관서(天官書)에 따르면 이는 병란이 일어나거나 간신이 임금을 덮어 가리는 불길한 조짐이었다. 봄 같은 겨울은 임금이 살피는 것이 분명치 않아 나라의 기강이 풀어져 느슨해진 것을 경고한 것으로 해석했다. '서경'에 나온다. 잇단 재변에 불안해진 숙종이 신하들에게 직접 글을 내려 직언(直言)을 청했다.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사직겸진소회소(辭職兼陳所懷疏)'를 올려 말했다. "아! 변괴는 그저 생기지 않고, 반드시 인사(人事)에 감응하는 것입니다. 삼가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는 지려(智慮)는 우뚝하시나 결단은 부족하신 듯하고, 영명(英明)하심..

[정민의 世說新語] [517] 흉종극말 (凶終隙末)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초한(楚漢)이 경쟁할 당시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대량(大梁)의 명사(名士)로 명망이 높았다. 처음에 두 사람은 부자(父子)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여러 역경을 함께 겪으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나중에 권력을 다투게 되자 경쟁 관계로 돌아섰다. 끝내는 장이가 지수(泜水)가에서 진여의 목을 베기에 이르렀다. 흉종(凶終), 그 시작은 참 좋았는데 마지막은 흉하게 끝이 났다. 전한(前漢) 시절 소육(蕭育)과 주박(朱博)은 절친한 벗이었다. 처음에 주박은 두릉정장(杜陵亭長)이란 낮은 벼슬에 있었다. 소육이 그를 적극 추천해서 차츰 승진해 구경(九卿) 지위에 올랐다. 정작 장군과 상경(上卿)을 거쳐 승상 자리까지 오른 것은 주박이 먼저였다. 이후 두 사람은 사소한 틈..

[정민의 世說新語] [516] 모란공작 (牡丹孔雀)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유득공(柳得恭·1748~1807)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에서 고려의 개성을 읊은 9수 중 제5수는 이렇다. "고려 때 재상이 살았던 집 가리키니, 황폐하다 비바람에 흙담마저 기울었네. 모란과 공작은 모두 다 스러지고, 노랑나비 쌍쌍이 장다리꽃 위를 난다.(指點前朝宰相家, 廢園風雨土墻斜. 牡丹孔雀凋零盡, 黃蝶雙雙飛菜花.)" 예전 고려 때 재상이 살던 집은 흙담마저 기울어 금세 무너져 내릴 판이다. 옛날 권력에 취해 거리낄 것 없던 시절에는 모란이 활짝 핀 정원에 공작새가 놀았을 것이다. 지금은 누군가 빈터에 일군 채마밭에 노랑나비만 난다. 고려 신종(神宗) 때 일이다. 참지정사(參知政事) 차약송(車若松)이 특진관 기홍수(奇洪壽)와 함께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갔다. 차..

[정민의 世說新語] [515] 울진 성류굴에서 나온 신라 글자 (窟神受法)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지난 11일 경북 울진 성류굴(聖留窟)에서 신라 때 각석(刻石) 명문 30여개를 발견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중 '정원 14년(798) 무인년 8월 25일에 승려 범렴이 다녀가다(貞元十四年, 戊寅八月卄五日, 梵廉行)'라는 명문은 1222년 전인 신라 원성왕 14년 때 것이다. 그 외 화랑 임랑(林郞)과 공랑(共郞)의 이름, 병부사(兵府史)라는 관직명, 장천(長天) 등의 지명도 나왔다 한다. 성류굴 기록은 이미 고려 때 이곡(李穀)이 쓴 '동유기(東遊記·1349)'에 나온다. 이에 따르면 성류굴 앞엔 성류사가 있었고, 굴은 어둡고 깊어 절의 승려가 횃불로 인도했다고 한다. 무릎으로 걷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좁은 구멍 사이로 기어들어 가면 부도(浮圖) 같고 불상 같은 갖은 형상의..

[정민의 世說新語] [514] 말이 참 무섭다 (可畏者言)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1779년 5월 나는 새를 떨어뜨린다던 홍국영(洪國榮)의 누이 원빈(元嬪)이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송덕상(宋德相)이 상소를 올렸는데, 서두에 '원빈께서 훙서(薨逝)하시니 종묘사직이 의탁할 곳을 잃었다'고 썼다. 당시 정쟁에 밀려 숨죽이며 지내던 채제공이 낮잠을 자다가 집사가 가져다준 그 글을 보았다. 채제공이 서두를 읽다 말고 놀라 말했다. "해괴하다. 원빈이 죽었는데 어째서 종묘사직이 의탁할 곳을 잃는단 말인가? 400년 종묘사직이 과연 일개 후궁에게 힘입어 의탁했더란 말인가? 게다가 후궁이 죽었는데 어째서 서거(逝去)라 하지 않고 훙서(薨逝)라 하는가?" 그가 이같이 혼자 중얼거렸을 때 그 자리에 가까운 친지 한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채제공은 한동안 더 낭패의 세월을 보..

[정민의 世說新語] [513] 앙급지어 (殃及池魚)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초나라가 원숭이를 잃자 화가 숲 나무에 이르렀고, 성 북쪽에 불이 나니 재앙이 연못 물고기에 미쳤다.(楚國亡猿, 禍延林木. 城北失火, 殃及池魚.)"는 말이 있다. 명나라 고염무(顧炎武)가 쓴 '일지록(日知錄)'에 보인다. 고사가 있다. 초나라 임금이 애지중지 아끼던 원숭이가 있었다. 어느 날 요 녀석이 묶인 줄을 풀고 달아났다. 임금은 원숭이를 잡아 오라며 펄펄 뛰었다. 숲으로 달아난 원숭이는 나무 위를 뛰며 도망 다녀 잡을 방법이 없었다. 임금의 노여움은 더 커졌다. 하는 수 없어 이들은 원숭이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온 숲을 에워싼 뒤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결국 원숭이도 못 잡고 그 좋던 숲만 결딴이 났다.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얘기다. 이번엔 성 북쪽에 불이 났다...

[정민의 世說新語] [512] 수상포덕 (守常抱德)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명나라 진무인(陳懋仁)의 '수자전(壽者傳)'을 읽었다. 역대 제왕과 국로(國老), 그리고 일반 백성 중 장수자의 전기를 모은 책이다. 두공(竇公)은 위나라 문후(文侯) 때의 악사였다. 나이가 280세였다. 문후가 두공을 불러 물었다. "무엇을 먹었길래 이렇게 오래 살았는가?" 그가 대답했다. "신은 나이 열세 살에 눈이 멀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이를 슬피 여겨 제게 금(琴)을 타도록 하셨지요. 날마다 연습하여 익히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습니다. 신은 따로 먹은 것이 없어 달리 말씀드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의 장수 비결은 장님이 된 뒤 마음을 온전히 쏟아 평생 악기 연주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이야기 끝에 붙은 찬(贊)은 이렇다. "훌륭하다 두공이여! 눈과 마음 적..

[정민의 世說新語] [511] 구구소한 (九九消寒)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강위(姜瑋·1820~1884)가 벗들과 저녁 모임을 가졌다. 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탁자 위 벼루는 꽁꽁 얼었다. 12명의 벗들이 차례로 도착하여 흰옷 위에 쌓인 눈을 털며 앉았다. 강위는 이날 함께 지은 시를 묶어 '구구소한첩(九九消寒帖)'이라 하였다. 강위가 지은 긴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뜬 인생 어디에다 몸을 부칠까? 세계란 허공 중의 한 떨기 꽃과 같네. 흘러가는 세월을 뉘 능히 잡나. 해와 달 두 탄환이 쟁반 위를 굴러간다.(浮生安所寄, 世界一華空中現. 流年誰能駐, 日月雙丸盤上轉.)" 환화(幻花)와 같은 세계 속에서 뜬 인생이 살아간다. 그나마 잠깐 만에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다. 구구소한(九九消寒)이란 표현이 낯설어 찾아보니 명나라 유동(劉侗)이 지은 '제경경물략..

[정민의 世說新語] [510] 약이불로 (略而不露)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덕무가 집안 조카 이광석(李光錫)의 글을 받았다. 제 글솜씨를 뽐내려고 한껏 기교를 부려 예닐곱 번을 되풀이해 읽어도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덕무가 이광석에게 답장을 썼다. 간추리면 이렇다. "옛날 수양제(隋煬帝)가 큰 누각을 짓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꾸며 놓고, 그 건물의 이름을 미루(迷樓)라고 했다더군. 자네 글이 꼭 그 짝일세. 참 멋있기는 하네만 뜻을 알 수가 없네. 얘기 하나 더 해 줄까? 어떤 이가 왕희지의 필법을 배워 초서를 아주 잘 썼다네. 양식이 떨어져 아침을 굶은 채 친구에게 쌀을 구걸하는 편지를 보냈다지. 그런데 그 친구가 초서를 못 읽어 저녁 때까지 쌀을 얻지 못했다네. 왕희지의 초서가 훌륭하긴 해도 알아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

[정민의 世說新語] [509] 적이능산 (積而能散)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예기(禮記) '곡례(曲禮)' 편의 서두를 함께 읽는다.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생각에 잠긴 것처럼 단정하며 말이 차분하면 백성이 편안하다(毋不敬 儼若思 安定辭 安民哉)." 상대를 존중하고 행동거지가 가볍지 않으며 말씨가 편안하고 안정되니 지도자에 대해 백성의 신뢰가 쌓인다는 말이다. "오만함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되고 욕심을 마음껏 부려서는 안 된다. 뜻은 한껏 채우려 들지 말고 즐거움은 끝까지 가서는 안 된다(敖不可長 欲不可從. 志不可滿 樂不可極)." 뭐든 절제해야 아름답다. "어진 사람은 가까워도 공경하고 두려워해도 상대를 아낀다. 아끼더라도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나 좋은 점을 안다. 쌓아둔 것을 능히 나누고 편안한 곳을 좋아해도 능히 옮긴다(賢者狎而敬之 畏而愛之. 愛而知其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