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498] 지단의장 (紙短意長)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위당 정인보 선생 일가의 한글 편지를 모아 펴낸 '한글로 쓴 사랑, 정인보와 어머니'를 읽었다. 그 모친의 편지 한 대목. "어느 누가 아들이 없으랴만 남다른 자식을 이 겨울철에 내어놓고 잠자고 밥 먹고 똑같이 지내니, 사람의 욕심이 흉하지 아니하냐. 밤낮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지금 들으니 네가 그저 방 속에 누워 있더라고 하니, 앓는 것을 속이는 것인지 간장이 녹을 지경이다. 빨리빨리 바른대로 편지 부쳐 쾌차한 것을 알게 하여라." 사연도 사연이려니와 그 낡은 종이쪽을 오롯이 간직한 그 정성이 놀랍다. 책 앞쪽에 40수의 '자모사' 시조 연작이 실렸다. 고교 시절 배운 글이라 왈칵 반갑다. 그중 제5수. "반갑던 님의 글월 설음될 줄 알았으리. /줄줄이 흐르는 정 상기 아..

[정민의 世說新語] [497] 문유십의 (文有十宜)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명나라 때 설응기(薛應旂·1500~ 1575)가 말한, 문장이 반드시 갖춰야 할 열 가지(文有十宜)를 소개한다. '독서보(讀書譜)'에 나온다. 첫 번째는 진(眞)이다. 글은 참된 진실을 담아야지 거짓을 희롱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다 드러내서는 안 되니 경계의 분간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실(實)이다. 사실을 적어야지 헛소리를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이때 다 까발리는 것과 사실을 말하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세 번째는 아(雅)다. 글은 우아해야지 속기(俗氣)를 띠면 안 된다. 겉만 꾸미고 속이 속되고 추하면 가증스럽다. 네 번째는 청(淸)이다. 글은 맑아야지 혼탁해서는 못쓴다. 그래도 무미건조해서는 곤란하다. 다섯 번째는 창(暢)이다. 글은 시원스러워야지 움..

[정민의 世說新語] [496] 이입도원 (移入桃源)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송나라 때 정위(丁謂)가 "아홉 겹 대궐 문이 활짝 열리니, 마침내 팔 저으며 들어가리라(天門九重開, 終當掉臂入)"라는 시를 지었다. 왕우칭(王禹 )이 말했다. "나라 문에 들어갈 때는 몸을 숙이고 들어가야 하거늘, 대궐 문의 안쪽을 어찌 팔뚝을 휘두르며 들어간단 말인가? 이 사람은 임금을 섬김에 반드시 충성스럽지 못할 것이다." 정위는 당당한 포부로 호기롭게 들어간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무심코 한 말 속에 평소의 본심이 드러났다. 그는 재상에 올랐으나 간신으로 이름을 남겼다. '언행휘찬(言行彙纂)'에 보인다. 지사(知事) 벼슬을 지낸 김원이 춘천에 살 때 일이다. 살림이 가난해 세금을 날짜에 맞춰 낼 형편이 못 되었다. 춘천부사에게 글을 올려 납기를 늦춰달라고 청했다. ..

[정민의 世說新語] [495] 한불방과 (閒不放過)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언행휘찬(言行彙纂)"의 한 대목. "한가할 때 허투루 지나치지 않아야, 바쁜 곳에서 쓰임을 받음이 있다. 고요할 때 허망함에 떨어지지 않아야, 움직일 때 쓰임을 받음이 있다. 어두운 가운데 속여 숨기지 않아야, 밝은 데서 쓰임을 받음이 있다. 젊었을 때 나태하고 게으르지 않아야, 늙어서 쓰임을 받음이 있다(閒中不放過, 忙處有受用. 靜中不落空, 動處有受用. 暗中不欺隱, 明處有受用. 少時不怠惰, 老來有受用)." 일 없다고 빈둥거리면 정작 바빠야 할 때 할 일이 없다. 고요할 때 허튼 생각 뜬 궁리나 하니 움직여야 할 때 찾는 이가 없다. 남이 안 본다고 슬쩍 속이면, 대명천지 밝은 데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젊은 시절 부지런히 노력하고 애써야지 늙었을 때 나를 찾는 곳이 있..

[정민의 世說新語] [494] 각병팔법 (却病八法)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수광(李睟光)이 '지봉유설'에서 인용한, 병을 물리치는 여덟 가지 방법[却病八法]을 소개한다. 첫째, "고요히 앉아 허공을 보며 모든 것을 비춰 보면, 생사시비와 이해득실이 모두 망령되어 참이 아니다(靜坐觀空, 照見一切, 生死是非, 利害得失, 皆妄非眞)." 망집(妄執)을 버려 참됨을 깨달아라. 둘째, "번뇌가 앞에 나타나 떨쳐 버릴 수 없거든, 한 가지 통쾌한 일을 찾아서 툭 놓아 버린다. 이른바 경계를 빌려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다(煩惱見前, 不能排遣, 宜尋一暢快事, 令其釋然. 所謂借境調心)." 번뇌를 풀어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라. 셋째, "언제나 나만 못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좋게 여겨 느긋하게 풀어준다(常將不如我者, 巧自寬解)." 위쪽만 보면 답이 없다. 나만 못한 처지를..

[정민의 世說新語] [493] 음주십과 (飮酒十過)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수광이 '지봉유설'에 쓴 술에 대한 경계를 읽어 본다. "술이 독이 됨이 또한 심하다. 평상시 내섬시(內贍寺)의 술 만드는 방은 기와가 썩어서 몇 년에 한 번씩 갈아준다. 참새조차 그 위로는 감히 모여들지 않는다. 술기운이 쪄서 올라오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 사람을 보니 술에 빠진 사람치고 일찍 죽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비록 바로 죽지는 않더라도 또한 고질병이 된다. 그 밖에 재앙을 부르고 몸을 망치는 것은 일일이 꼽을 수조차 없다. 어떤 이는 술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여색보다 심하다고 하니 맞는 말이다." 내섬시는 대궐에서 필요한 술을 만들어 조달하는 관청이다. 술기운이 어찌나 독한지 술 만드는 건물의 기와가 몇 년을 못 견뎌 썩어나갈 지경이다. 그 독한 기운을 몸속..

[정민의 世說新語] [492] 순안첩공 (瞬眼輒空)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번잡한 일상에서 조촐한 삶을 꿈꾼다. 도륭(屠隆)의 '청언(淸言)' 몇 칙을 골라 읽는다. "늙어가며 온갖 인연이 모두 부질없음을 자각하게 되니, 인간의 옳고 그름을 어이 상관하겠는가? 봄이 오매 그래도 한 가지 일에 마음이 끌리니 다만 꽃이 피고 시드는 것이라네(老去自覺萬緣都盡, 那管人是人非. 春來尙有一事關心, 只在花開花謝)." 부지런히 인맥을 관리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소중히 하며 살았어도 문득 돌아보면 덧없다. 제 한 몸 옳게 간수하기도 버겁다. 내가 옳다 해도 옳은 것이 아니요, 내가 그르다 해도 남들은 수긍하지 않는다. 세상일에 옳다 그르다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봄이 오면 자꾸 화단의 꽃 소식에 마음이 이끌린다. 오늘 막 핀 꽃이 밤사이 비바람에 꺾여 땅에 떨어..

[정민의 世說新語] [491] 두문정수 (杜門靜守)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곱게 물든 은행잎에 아파트 단지 길이 온통 노랗다. 느닷없이 밤송이를 떨궈 사람을 놀라게 하던 마로니에 나무의 여섯 잎도 노랗게 물들었다. 만추(晩秋)의 고운 잎을 보면서 곱게 나이 먹어가는 일을 생각했다. 이수광(李睟光·1563~1628)이 말했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역경이 적지 않다. 구차하게 움직이다 보면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다. 이 때문에 바깥일이 생기면 안배하고 순응하고, 형세나 이익의 길에서는 놀란 것처럼 몸을 거둔다. 다만 문을 닫아걸고 고요하게 지키면서 대문과 뜨락을 나가지 않는다. 마음과 운명의 근원을 마음으로 살피고, 함양하는 바탕에 대해 오로지 정신을 쏟는다. 엉긴 먼지가 방 안에 가득하고 고요히 아무도 없는 것같이 지내도, 마음은 환히 빛나 작..

[정민의 世說新語] [490] 독서삼도 (讀書三到)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송나라 주희(朱熹)가 '훈학재규(訓學齋規)'에서 말했다. '독서에는 삼도(三到)가 있다. 심도(心到)와 안도(眼到), 구도(口到)를 말한다. 마음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눈은 자세히 보지 못한다. 마음과 눈이 한곳에 집중하지 않으면 그저 되는 대로 외워 읽는 것이라 결단코 기억할 수가 없고, 기억한다 해도 오래가지 못한다. 삼도 중에서도 심도가 가장 급하다. 마음이 이미 이르렀다면 눈과 입이 어찌 이르지 않겠는가(讀書有三到, 謂心到眼到口到. 心不在此, 則眼不看仔細, 心眼旣不專一, 却只漫浪誦讀, 決不能記, 記亦不能久也. 三到之中, 心到最急. 心旣到矣, 眼口豈不到乎)?' 이른바 독서삼도(讀書三到)의 얘기다. 비중으로 따져 심도를 앞세우고 안도와 구도의 차례를 보였다. 안도는 눈으로 ..

[정민의 世說新語] [489] 문유십기 (文有十忌)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명나라 원황(袁黃·1533~1606)이 글쓰기에서 꺼리는 열 가지를 꼽아 '문유십기(文有十忌)'를 썼다. '독서보(讀書譜)'에 나온다. 첫째는 두건기(頭巾氣)다. 속유(俗儒)나 늙은 서생이 진부한 이야기를 배설하듯 내뱉은 글이다. 둘째는 학당기(學堂氣)다. 엉터리 선생의 글을 학생이 흉내 낸 격의 글이다. 뜻이 용렬하고 견문은 조잡하다. 셋째는 훈고기(訓誥氣)다. 남의 글을 끌어다가 제 말인 양 쓰거나, 버릇처럼 따지고 들어 가르치려고만 들면 못쓴다. 넷째는 파자기(婆子氣)다. 글은 핵심을 곧장 찔러, 툭 터져 시원스러워야지, 했던 말 자꾸 하고 안 해도 될 얘기를 섞으면 노파심 많은 할머니 글이 되고 만다. 다섯째는 규각기(閨閣氣)다. 규방의 아녀자처럼 눈썹을 그리고 입술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