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488] 득구불토 (得句不吐)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옛 전시도록을 뒤적이는데, 추사의 대련 글씨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옆에 쓴 글씨의 사연이 재미있다. "유산(酉山) 대형이 시에 너무 빠진지라, 이것으로 경계한다(酉山大兄淫於詩, 以此箴之)." 유산은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丁學淵)이다. 아버지가 강진으로 유배간 뒤, 그는 벼슬의 희망을 꺾었다. 다산은 폐족(廢族)이 된 것에 절망하는 아들에게 학문에 더욱 힘쓸 것을 주문했지만, 그는 학문보다 시문에 더 마음을 쏟았다. 추사는 그와 막역한 벗이었다. 추사가 정학연에게 써준 시구는 이렇다. "구절을 얻더라도 내뱉지 말고, 시 지어도 함부로 전하지 말게(得句忍不吐, 將詩莫浪傳)." 마음에 꼭 맞는 득의의 구절을 얻었더라도, 꾹 참고 배 속에만 간직하고, 흡족한 시를 지었다 해도 세상에..

[정민의 世說新語] [487] 춘몽수구 (春夢水漚)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1)의 시를 찾아 읽었다. 문종의 왕자로 태어나 평생 불법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스님도 만년에는 허망하고 허탈했던 모양이다. '해인사로 물러나 지내며 짓다(海印寺退居有作)'4수 중 2수를 읽어본다. '여러 해 굴욕 속에 제경(帝京)서 지냈건만, 교문(敎門)도 공업도 이룸 없음 부끄럽다. 이때에 도 행함은 헛수고일 뿐이니, 임천에서 성정을 즐거워함만 하랴(屈辱多年寄帝京, 敎門功業恥無成. 此時行道徒勞爾, 爭似林泉樂性情).' 무얼 이뤄보겠다고 멀리 중국 땅까지 가서 여러 해 머물며 굴욕을 견디며 애를 써 보았다. 돌아보면 뜻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다친 마음을 자연에서 쓰다듬어 타고난 본성을 즐기는 것이 옳고도 옳다. 제4수는 이렇다. '부귀영화 ..

[정민의 世說新語] [486] 궁이불궁 (窮而不窮)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궁한데 궁한 것은 탐욕 때문이다. 궁하지만 궁하지 않은 것은 의리에서 궁하지 않아서다. 궁하지 않은데도 궁한 것은 어리석음 탓이다. 궁하지 않은데 궁하지 않은 것은 예의에 궁하지 않아서다. 이 때문에 군자는 가난해도 의리를 알고, 부유해도 예법을 안다(窮而窮者, 窮于貪. 窮而不窮者, 不窮于義. 不窮而窮者, 窮于蠢. 不窮而不窮者, 不窮于禮. 是故君子貧而知義, 富而知禮)." 명나라 사람 팽여양(彭汝讓)이 '목궤용담(木几冗談)'에서 한 말이다. 궁함을 헤어나지 못함은 탐욕을 억제하지 못해서다. 노력하지 않고 일확천금만 꿈꾼다. 의리를 붙들면 물질이 궁해도 정신은 허물어지는 법이 없다. 잘살면서 늘 궁하다 느끼는 것은 내면의 허기 탓이다. 넉넉하면서도 구김살이 없는 것은 예(禮)를 ..

[정민의 世說新語] [485] 봉인유구 (逢人有求)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시인 김수영(1921~1968)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한 말이다. 왕궁의 음탕이나 붙잡혀간 소설가, 월남 파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 내면서,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설렁탕집 주인에게 옹졸하게 분개하고, 20원을 받으러 서너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 자신의 지질함을 경멸했다. 그러면서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하고 자조했다. '부탁'에서는 "자라나는 죽순(竹筍) 모양으로 부탁만이 늘어간다. 귀찮은 부탁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갖다 주는 것으로 연명을 하고 보니 거절할 수도 없는"이라고 했고, "완전히 무시를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부..

[정민의 世說新語] [484] 지족보신 (知足保身)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나라의 곳간 옆에 사는 백성이 있었다. 그는 아무 하는 일 없이 평생을 백수로 살았다. 종일 집에서 빈둥거리다 저녁때가 되면 어슬렁거리며 나가 밤중에 돌아왔다. 손에는 어김없이 다섯 되의 쌀이 들려 있었다. 어디서 난 쌀이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수십 년을 흰 쌀밥 먹고 좋은 옷 입으며 온 식구가 잘 살았다. 막상 집안을 들여다보면 세간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늙어서 죽게 되었을 때 아들을 불렀다. "내 말을 잘 듣거라. 집 뒤 나라의 곳간 몇 번째 기둥 아래 집게손가락만 한 작은 구멍이 있다. 그 안쪽에는 쌀이 가득 쌓여 있다. 너는 손가락 굵기의 막대로 그 구멍을 후벼 파서 쌀을 하루 다섯 되만 꺼내 오너라. 더 가져오면 안 된다." 이 말을 남기고 백성은 세상을 떴다..

[정민의 世說新語] [483] 인품훈유 (人品薰蕕)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송나라 때 구양수(歐陽脩)는 후진들의 좋은 글을 보면 기록해두곤 했다. 나중에 이를 모아 '문림(文林)'이란 책으로 묶었다. 그는 당대의 문종(文宗)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후배들의 글을 이렇듯 귀하게 여겼다. 송나라 오자량(吳子良)은 자신의 '임하우담(林下偶譚)'에서 이 점이 바로 구양수가 일세의 문종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라고 썼다. 구양수는 '여유원보서(與劉原父書)'에서 "왕개보(王介甫)가 새로 쓴 시 수십 편을 얻었는데 모두 기이하고 절묘해서, 시도(詩道)가 적막하지만은 않음을 기뻐하며 그대에게 알려 드리오"라고 썼다. 또 '답매성유서(答梅聖兪書)'에는 "소식(蘇軾)의 글을 읽으니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나더군요. 통쾌하고 통쾌합니다. 이 늙은이가 마땅히 길을 비켜..

[정민의 世說新語] [482] 억양개합 (抑揚開闔)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옛 수사법에 억양개합(抑揚開闔)이 있다. 억양은 한 번 누르고 한 번 추어주는 것이고, 개합은 한 차례 열었다가 다시 닫는 것이다. 말문을 열어 궁금증을 돋운 뒤 갑자기 닫아 여운을 남긴다. 평탄하게 흐르던 글이 억양개합을 만나 파란이 일고 곡절이 생긴다. 김삿갓이 떠돌다 회갑 잔치를 만났다. 목도 컬컬하고 시장하던 터라 슬며시 엉덩이를 걸쳤다. 주인은 그 행색을 보고 축하시를 지어야 앉을 수 있다고 심통이다. 과객이 지필묵을 청한다. 제까짓 게 하는데, "저기 앉은 노인네 사람 같지 않으니(彼坐老人不似人)"라고 쓴다. 자식들의 눈초리가 쑥 올라갔다. "아마도 하늘 위 진짜 신선 내려온 듯(疑是天上降眞仙)." 금세 좋아 표정이 풀어진다. 일억일양(一抑一揚), 한 번 깎고 한 번..

[정민의 世說新語] [481] 다자필무 (多者必無)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바쁜 일상 속에서도 평온을 꿈꾼다. 일에 파묻혀 살아도 단출한 생활을 그리워한다. 명나라 팽여양(彭汝讓)의 '목궤용담(木几冗談)'을 읽었다. "책상 앞에서 창을 반쯤 여니, 고상한 흥취와 한가로운 생각에 천지는 어찌 이다지도 아득한가? 맑은 새벽에 단정히 일어나서는 대낮에는 베개를 높이 베고 자니, 마음속이 어찌 이렇듯이 깨끗한가(半窗一几, 遠興閑思, 天地何其寥闊也. 淸晨端起, 亭午高眠, 胸襟何其洗滌也)?" 새벽 창을 여니 청신한 기운이 밀려든다. 생각은 끝없고 천지는 가없다. 낮에는 잠깐 눈을 붙여 원기를 충전한다. 마음속에 찌꺼기가 하나도 없다. "몹시 조급한 사람은 반드시 침착하고 굳센 식견이 없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대개 우뚝한 견해가 없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틀림..

[정민의 世說新語] [480] 검신성심 (檢身省心)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송나라 때 이방헌(李邦獻)이 쓴 '성심잡언(省心襍言)'을 읽는데 '성(省)'자의 생김새에 자꾸 눈길이 간다. 성(省)은 살피고 돌아본다는 의미이나, '생'으로 읽으면 덜어낸다는 뜻이 된다. 돌이켜 살피는 것이 반성(反省)이라면, 간략하게 줄이는 것은 생략(省略)이다. 이 둘은 묘하게 맞닿아 있다. 자세히 살피려면 눈[目]을 적게[少] 즉 가늘게 뜨고 보아야 한다. 또 항목(項目)을 줄여야만[少] 일을 덜어낼 수가 있다. 어찌 보면 잘 살피는 일은 잘 덜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 해도 될 것을 갈라내고, 해야만 할 일 속에 슬쩍 끼어드는 안 해도 될 일과 안 해야 될 일을 솎아낸다. 반성과 생략은 이렇게 하나로 다시 맞물린다. 이덕형(李德馨)은 '사직차(辭..

[정민의 世說新語] [479] 산산가애 (珊珊可愛)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산산(珊珊)은 형용사다. 원래는 허리에 패옥을 차고 사람이 걸을 때 가볍게 부딪쳐 나는 소리를 말한다. 사뿐사뿐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습을 형용하는 표현으로도 자주 쓴다. 당나라 원진(元稹)은 '비파가(琵琶歌)'에서 "한 연주 막 끝나고 또 한 차례 연주하니, 고요한 밤 구슬 주렴 바람에 쟁글쟁글(一彈旣罷又一彈, 珠幢夜靜風珊珊)"이라고 했다. 미인이 주렴 안쪽에서 비파를 연주한다. 그녀가 뜯는 비파의 울림이 고요한 밤중에 구슬주렴을 진동시켜 가볍고 은은한 소리를 낸다는 뜻이다. 송나라 때 신기질(辛棄疾)의 '임강선(臨江仙)'도 있다. "남쪽 연못 밤비가 새 기와를 울리니, 삼경이라 소낙비 쟁글쟁글 들리네(夜雨南塘新瓦響, 三更急雨珊珊)." 새로 얹은 기왓장을 빗방울이 때리고,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