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세설신어 402

[정민의 世說新語] [448] 경경유성 (輕輕有聲)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김굉필(金宏弼·1454~1504)의 초립(草笠)은 연실(蓮實)로 갓끈의 영자(纓子)를 달았다. 조용한 방에 들어앉아 깊은 밤에도 책을 읽었다. 사방은 적막한데 이따금 연실이 서안(書案)에 닿으면서 가볍게 울리는 소리가 밤새 들렸다(輕輕有聲). 스승 김종직(金宗直)이 산림의 중망(重望)을 안고 이조참판에 올랐지만, 막상 아무 하는 일이 없었다. 김굉필이 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도란 겨울에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 마심이니, 개면 가고 비 오면 멈춤을 어이 능력 있다 하리. 난초 만약 세속을 따르면 종당엔 변하리니, 소는 밭 갈고 말은 탄단 말 그 누가 믿으리오道在冬裘夏飮氷, 霽行潦止豈全能. 蘭如從俗終當變, 誰信牛耕馬可乘)." 시의 뜻은 이렇다. "선생님! 대체 이게 뭡니까? ..

[정민의 世說新語] [447] 석원이평(釋怨而平)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동네 영감 둘이 심심풀이로 내기 장기를 두었다. 한 수를 물리자고 승강이를 하던 통에 뿔이 나 밀었는데 상대가 눈을 허옇게 뒤집더니 사지를 쭉 뻗고 말았다.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졸지에 살인자가 된 영감은 기가 막혀 넋을 놓았다. 집에 있던 두 아들도 얼이 빠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밖에서 소식을 듣고 셋째가 달려왔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 셋째는 제 아버지를 나오래서 기둥에다 동여 묶더니 휑하니 나갔다. 잠시 후 죽은 이의 큰아들을 끌고 와 묶인 제 아버지 앞에 세웠다. "자, 죽여라." "?!" "네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아니냐? 어서 죽여라." "그럼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긴. 우리 아버지가 네 아버질 죽였으니, 너는 우리 아버질 죽이고, 그러면 네가..

[정민의 世說新語] [445] 이난삼구(二難三懼)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당 태종의 '집계정삼변(執契靜三邊)' 시에 "해 뜨기 전 옷 입어 이난(二難) 속에 잠들고, 한밤중에 밥 먹고 삼구(三懼)로 새참 삼네(衣宵寢二難, 食旰餐三懼)"라 한 구절이 있다. 의소(衣宵)는 해 뜨기 전 일어나 옷을 입는다는 말이고, 식간(食旰)은 해 진 뒤에 비로소 저녁 식사를 한다는 뜻이다. 의소식간(衣宵食旰)은 임금이 정사를 돌보느라 불철주야 애쓰는 것을 칭송하는 의미로 쓴다. 시에서 당 태종이 밤낮 바쁜 중에도 잊지 않겠다고 새긴 이난(二難)과 삼구(三懼)의 내용은 뭘까? 이난은 '좌전(左傳)' 양공(襄公) 10년 조에 나온다. 자공(子孔)이 정(鄭)나라의 반란을 평정한 뒤 관원들에게 일제히 충성 맹세를 받으려 했다. 자산(子産)이 만류하며 말했다. "뭇사람의 분노..

[정민의 世說新語] [444] 괘일루만 (掛一漏萬)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임금께 올린 '물길을 따라 둔보(屯堡)를 두는 문제에 대해 올리는 글(措置沿江屯堡箚)'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신은 오랜 병으로 정신이 어두워 말에 두서가 없습니다. 하지만 얼마간 나라 근심하는 정성만큼은 자리에 누워 죽어가는 중에도 또렷합니다. 간신히 붓을 들었으나 괘일루만(掛一漏萬)인지라 모두 채택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하지만 삼가 성지(聖旨)에 대해 느낌이 있는지라 황공하옵게 아뢰나이다(臣病久神昏, 言無頭緖. 然其一段憂國之忱, 耿耿於伏枕垂死之中. 艱難操筆, 掛一漏萬, 皆不足採. 然伏有感於聖旨之下, 惶恐陳達)." 퇴계(退溪) 이황(李滉)도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서 "신이 비록 평소 꾀가 어두우나 붉은 정성을 다하여 한 가지라도 얻으려..

[정민의 世說新語] [443] 국곡투식 (國穀偸食)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사철가'는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로 시작한다. 가락이 차지다. 가는 세월을 늘어진 계수나무 끝 끄터리에다 대랑 매달아 놓고 "국곡투식(國穀偸食) 하는 놈과 부모 불효 하는 놈과 형제 화목 못 하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 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 앉아서 한잔 더 먹소 덜 먹게 하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 하는 끝 대목에 이르면 공연히 뜨끔해져서 마음자리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든다. 신관 사또에게 모진 매를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의 심정을 노래한 12잡가 중 '형장가(刑杖歌)'에도 "국곡투식 하였느냐 엄형중치(嚴刑重治)는 무삼 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국곡투식은 나라 곡식을 훔쳐 먹는다는 말이다. 서리(胥吏)들이 장부를 ..

[정민의 世說新語] [442] 주미구맹(酒美狗猛)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술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술 맛이 훌륭했다. 그런데 맛이 시어 꼬부라지도록 사가는 사람이 없었다. 연유를 몰라 이장(里長)을 찾아가 물었다. 이장이 말했다. "자네 집 술 맛이야 훌륭하지. 하지만 자네 집 개가 너무 사나워서 말이지." 제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에게 물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걱정거리가 있는가?" "사당의 쥐 때문에 걱정입니다. 쥐란 놈이 사당에 구멍을 뚫었는데, 연기를 피우자니 불이 날까 겁나 어쩌지를 못합니다." 위령공(衛靈公)이 옹저(癰疽)와 미자하(彌子瑕)를 등용했다. 두 사람이 권력을 전단해서 임금을 가렸다. 복도정(復塗偵)이 임금에게 나아가 말했다. "꿈에 임금을 뵈었습니다." "무얼 보았더냐?" "꿈에 조군(竈君), 즉 부뚜막 신을 보았습니..

[정민의 世說新語] [441] 남방지강(南方之强)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스물네 살 나던 늦가을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과거 시험공부에 얽매여 경전 읽기를 게을리한 것을 반성하면서 '중용'을 펼쳤다. 9월 9일부터 시작해 11월 1일까지 날마다 '관독일기(觀讀日記)'를 썼다. 그날 읽은 '중용'의 해당 부분과 읽은 횟수, 그리고 소감을 적어 나갔다. 9월 23일자 '관독일기'에서 그는 독서를 약(藥)에다 비유했다. "중용이란 것은 원기가 충실하고 혈맥이 잘 통해, 손발이 잘 움직이고 귀와 눈이 총명해서 애초에 아무런 통증이 없는 종류이다. 중용을 잘하지 못하는 자는 처음에는 성대하고 씩씩하지 않음이 없으나 지니고 있던 병의 뿌리가 점차 번성하여 온갖 질병이 얽혀드니 만약 때에 맞게 조치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죽음의 지경에 이르고 만다." ..

[정민의 世說新語] [440] 작각서아 (雀角鼠牙)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시경' '소남(召南)'편의 '행로(行露)'는 송사(訟事)에 걸려든 여인이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문맥이 똑 떨어지지 않아 역대로 해석이 분분하다. 1절은 이렇다. "축축한 이슬 길을 새벽과 밤엔 왜 안 가나? 길에 이슬 많아서죠(厭浥行露, 豈不夙夜? 謂行多露)." 묻고 답했다. 이른 새벽이나 야밤에 다니지 않음은 이슬로 옷을 적시게 될까 걱정해서다. 여자가 밤길을 다니다 강포한 자에게 더럽힘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내용으로 읽는다. 이어지는 2절. "참새 뿔이 없다고 누가 말했나? 무엇으로 내 집 지붕 뚫었겠는가? 네가 아내 없다고 누가 말했나? 무엇으로 나를 옥에 불러들였나? 나를 옥에 불러와도, 실가(室家) 되긴 부족하리(誰謂雀無角? 何以穿我屋? 誰謂女無家? 何以速我..

[정민의 世說新語] [439] 자만난도 (滋蔓難圖)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윤기(尹愭·1741~1826)가 채마밭에서 잡초를 김매다가 '서채설(鋤菜說)'을 썼다. 여러 날 만에 채마밭에 나가 보니 밭이 온통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채소는 잡초에 기가 눌려 누렇게 떠 시들었다. "아! 이것은 아름다운 종자인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꼬? 저 남가새나 도꼬마리는 사람에게 아무 유익함이 없건만 누가 저리 무성히 자라게 했더란 말인가?" 깨끗이 김을 매주자 채소가 겨우 기를 펴서 바람에 잎이 살랑대며 기쁜 빛이 있었다. 그가 다시 말한다. "앞서 채소가 처음 났을 때 이렇게 시원스레 해주었다면 비와 이슬을 고루 받아 생기를 타고 잘 자라 아침저녁으로 따서 내 밥상을 도왔을 것이다. 저 나쁜 잡초가 어찌 침범할 수 있었겠는가? 또 채소가 잡초에 곤욕을 겪은 ..

[정민의 世說新語] [438] 구전지훼(求全之毁)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맹자가 말했다. "예상치 못한 칭찬(不虞之譽)이 있고, 온전함을 구하려다 받는 비방(求全之毁)이 있다." '맹자' '이루(離婁)'에 나온다. 여씨(呂氏)의 풀이는 이렇다. "행실이 칭찬을 얻기에 부족한데도 우연히 칭찬을 얻는 것이 바로 예상치 못한 칭찬이다. 비방 면하기를 꾀하다 도리어 비방을 불러온 것이 바로 온전함을 구하려다 받는 비방이다. 비방하고 칭찬하는 말이 반드시 다 사실은 아니다(行不足以致譽, 而偶得譽, 是謂不虞之譽. 求免於毁而反致毁, 是謂求全之毁. 毁譽之言, 未必皆實)." 사람들은 겉만 보고 판단하고,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듣고 보는 데 따라 칭찬과 비방이 팥죽 끓듯 한다. 잘하려고 한 일인데 비방만 얻고 보니 서운하다. 어쩌다 그리된 일에 칭찬 일색은 멋쩍..